해가 기울고 있었다. 전장은 더 이상 함성과 쇳소리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쓰러진 말들, 산산조각 난 창끝, 무너진 마법진, 그리고 두려움에 떨다 퇴각한 제국군의 잔해가 천비문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환호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건'이 있었기에 얻은 평온일 뿐이라는 것을.
위청은 성루 위에 홀로 서 있었다. 발밑으로 지나가는 수련생들과 고수들, 그들은 눈으로 조용히 승리를 확인했지만, 마음속엔 무거운 먹구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주의 눈은 저 멀리 서쪽 하늘로 스며드는 붉은 석양 너머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건이 다가왔다.
"제가 천비문을 위한 도움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말은 예고 없는 작별처럼 들렸다. 위청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이제 곧 전란의 시대가 올 것이라 했지. 그걸 알면서도 떠난다는 건가?"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군도, 육왕군도, 천비문도. 이제는 서로를 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묶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드래곤과의 협약이 깨졌습니다. 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 위청의 눈매가 흔들렸다. "드래곤… 그들과의 전쟁이라. 자네는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자 아닌가? 그런 자네가 나서면 되는 일 아닌가?"
건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제 안에 결집되어 있던 힘이 소멸되기 시작했거든요. 이미 그 힘은 여러 사람들에게 흩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선배님도 아마 모르는 사이 비약적인 상승을 겪었을 겁니다. 곧 세계 전역에서 스테이터스 자체가 상승하고, 각 세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질 겁니다. 단, 이젠 누구도 대신 싸워주지 않습니다."
"왜 신은 그런 결정을 내린 건가? 이젠 귀찮아진 건가?" 위청의 목소리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아닙니다. 절대자가 한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면, 그 사회는 자생력을 잃고 정체됩니다. 지도자들은 판단을 멈추고, 민중은 스스로의 의지를 꺾은 채 보호만을 갈구하게 되죠. 결국 질서는 고이고, 균형은 무너집니다. 절대자의 존재는 질서를 위한 수단이어야지, 지배의 목적으로 변질되어선 안 됩니다. 균형이란, 모두가 책임을 나눌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천비문이 이번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제가 개입했기 때문이지만, 그 방식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설 때입니다."
"그럼 자네가 스스로 내려놓은 건가?"
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신의 영역을 침범했고, 균형을 무너뜨린 존재로서, 이 세계에 더 머물 수 없습니다."
위청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드래곤들은 왜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한 거지? 그들도 인간들과 손잡고 살고 있지 않나?"
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문제는 그 손잡은 방식입니다. 그들은 일부 인간 왕국을 조종했고, 고위층에 스며들어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번 전쟁은 단순한 인간 대 드래곤이 아닙니다. 드래곤이 드래곤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그럼 그들을 자네가 제거하면 될 일 아닌가?"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무리하게 제거하면, 세계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개입할 수 없습니다."
위청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결국 우리는 멸문될 수도 있겠군."
건은 조용히 말했다. "황금빛을 지닌 자가 세상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준비 중입니다. 그가 나설 때까지, 각 세력이 버텨야만 합니다."
위청은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신의 예언이라면 할 말이 없지. 하지만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을 거네."
그는 허리춤에서 검집 하나를 꺼냈다. 날이 없는 듯 보이지만, 보는 이의 눈빛을 서서히 압도하는 검이었다. 건은 그것을 위청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게 남은 마지막 힘으로 만든 것입니다. 단 한 번, 주변의 모든 마력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이든 인간이든, 마력의 근원 자체를 끊어냅니다. 천비문이 멸문당하는 것만은 막고자 하는 제 마지막 의지입니다."
위청은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일시적인 효과인가?"
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드래곤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들 역시 평범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으로 변한 드래곤은 더 이상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죠."
위청은 다시 물었다. "왜 이런 걸 나에게 맡기는 거지? 그럼 황금빛 기운을 이끄는 자도 마력이 사라지나?"
"네. 그도 마력은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황금빛은 마력과는 다른 근원을 지녔습니다."
"그럼 결국 다른 힘을 쓰는 자란 말인가?"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그 이상입니다.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빛은 이 세계의 균형을 새롭게 그릴 수 있을 겁니다."
위청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언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그건 제가 정할 수 없습니다. 선배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모든 드래곤을 한자리에 모아 힘을 제거할 때 사용하셔도 되고, 천비문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순간에 써도 됩니다."
위청은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자체가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겠지. 이건 자네가 말한 균형과도 어긋나는 물건이야."
건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제가 절대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며 얻은 보상 같은 것입니다. 이 검이 부작용을 남기거나 세계의 방향을 바꾸게 되더라도, 이제는 제가 책임질 수 없는 일입니다."
위청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럼 자네는 이제 사라지는 건가? 지금부터?"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신과 마저 정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없어진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절대자의 실루엣이 천비문 성루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어둠 너머,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