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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수영모자, 이어진 온기

온 마을이 나서다

by 맛있는 하루


요즘같이 수영장 가기 좋은 날이 어디 있을까. 알록달록 단풍 구경은 기본에, 노란 모과, 빨간 감까지 주렁주렁 열렸다. 여기가 서울 한복판인가 시골 전원주택인가 싶다.


파란 하늘까지 더해져 수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제일 선호하는 사물함 번호키까지 받았다.


'오~ 오늘 로또 사러 가야 하나?' 운수 좋은 날이다.


샤워실에서 머리를 감고, 비누거품을 낸다. 비누 거품도 어째 더욱 하얗고 풍성하다.


'오늘은 뱃살도 없네? 와.. 수영복 핏 봐라. 전문 모델은 아니어도, 키 작은 일반인 모델? 아니 시니어 모델에 도전해볼까?'


무슨 근자감에서였는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수모를 썼다.


부....욱.


"악! 엄마야!"


햇님 방긋 웃고 있는 나의 귀염둥이 수모(수영모자)가 찢어졌다. 쭈욱하고.


"자기야, 왜 그래?"


나의 비명 아닌 요상한 비명소리를 듣고 젊은 언니(수영장에서는 다들 이름을 모른다. 젊은 언니, 그냥 언니, 젊은 어르신, 어르신만 있을 뿐)가 물었다.


"수모가 찢어졌어요."


"파우더룸에 가면 놓고 간 수모들 있더라. 찾아봐."


파우더룸, 탈의실 선반을 다 뒤져도 없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생각났다. 정말 수영하기 딱 좋은 날이었는데, 수영하지 말라는 것인가. 일단 수영복을 벗었다.


"왜?? 놓고 간 수모 없어?"


"네. 굴러다니던 수모가 오늘은 없네요."


"안 돼. 안 돼. 잠깐만, 기다려봐."


온탕에 앉아 반신욕을 하시던 왕언니가 해결사로 나섰다. 사우나로 들어오려던 (나는 잘 모르는) 회원분들에게 외치신다.


"여기 젊은 엄마, 수영해야 해. 허리가 아파서 하루도 수영을 빠지면 안 되는 언니가 수모가 찢어졌다. 수모 남는 거 주변에 있나들 봐봐."


"어머, 그 수영 열심히 하는 젊은 엄마?"


"응. 이 언니는 수영해야 해. 수모를 찾든지, 빌려주든지 해야 해."


"어머, 나 마침 저쪽에서 수모 하나 굴러다니는 거 봤는데??"


"어디 어디?"


"잠깐만. 내가 가지고 올게."


사우나에 들어오시려던 분이 사라지셨다가 1분도 안 되어 들어오셨다.


"짜~~잔! 내가 찾았지롱~! 젊은 엄마 어딨어?"


"여기요!! 어머머!! 완전 완전 감사합니다. 저 오늘 수모 찢어진 김에 수영 안 하고 게으름 피울까 했는데, 열심히 할게요."


옆에 계시던 다른 분이 말씀하신다.


"그럼 그럼. 우리는 게으름 펴도 자기는 매일 열심히 해야 해. 젊은 엄마가 열심히 수영하는 거 보면서 대리만족하고 있어."


"그렇지. 아 맞다! 자기 실리콘 수모 쓰더라? 내가 얼마 전에 실리콘 수모가 예뻐서 샀는데, 아무래도 난 실리콘이 안 맞아. 내가 내일 그거 갖다줄 테니까, 괜히 수모 새로 사지 마."


"정말요? 정말 안 쓰셔요?"


"그렇다니까!! 사지마. 사지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찢어진 수모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이 말이 비단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싶다.


수모가 찢어져 당황하고 있는 나를 위해 샤워실에 있던 모든 회원들이 총동원되었다. 누군가는 수모를 찾아 헤맸고, 누군가는 새 수모를 약속했다.


이곳에서는 오십 살 나도 '젊은 엄마'로 통한다.


땅 위에서는 옷을 다 입고도 낯을 가리는 최강 내향형 ISFJ지만, 홀딱 벗고서도 가끔은 E 성향을 띠게 만드는 곳.


나는 점점 더 수영이, 수영장이 좋아진다.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물 밖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순간들이 더 소중해진다.


오늘은 누군가가 두고 간 수모를 쓰고 수영했다. 내일은 왕언니가 약속한 실리콘 수모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황하는 누군가에게 "잠깐만, 내가 찾아볼게"라고 말할 것이다.


수영장에서 배우는 건 영법만이 아니다. 물속보다 물 밖이, 더 따뜻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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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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