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문어와 나, 열탕에서의 명상
"그래, 바로 이맛이지. 아~~ 시원하다."
목욕탕 열탕에 앉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수영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이곳, 열탕에 몸을 담근다.
수영장 물속에서 한 시간 가까이 팔다리를 움직인 탓에 몸은 차갑게 식어있고, 근육은 피로로 뻣뻣하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곧 온기를 품어 말랑해질 테니까.
샤워 후,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열탕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발끝부터 담근다. 뜨겁다. 이 뜨거움이 좋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낮춘다. 종아리, 허벅지, 허리, 그리고 어깨까지.
물이 어깨를 감싸는 순간, "하아~~, 좋다. 좋아." 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이런 것일까.
'수영장 염소 냄새, 이제 좀 빠져나간 것 같네.'
수영장 소독약 냄새가 좋아 매일 수영장에 와도, 내 몸에서 나는 염소 냄새는 빼고 싶다.
뜨거운 물이 피부 깊숙이 스며든다. 차가웠던 몸속 어딘가에서 온기가 피어오른다. 열탕의 김은 수영장 소독물의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따스함을 채워 넣는다. 몸에 열기가 조금씩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이제 사우나로 가볼까.'
건식 사우나실 문을 연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때린다. 나무 벤치에 앉아 모래시계를 세팅한다. 한 번에 5분, 모래시계를 두 번 돌리면 10분이다.
눈을 감는다. 땀이 이마에서, 목덜미에서, 등에서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다. 처음엔 한 방울, 두 방울, 이내 줄줄 흐른다.
'이게 진짜 땀을 뺀다는 거지.'
10분이 지나고 사우나실을 나온다. 몸이 후끈거린다. 샤워기를 틀어 찬물을 끼얹는다. 뜨거웠던 피부가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기분이 좋다. 냉탕으로 가서 발을 담그자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다. 심호흡을 하고 몸을 담근다. 차갑다. 정신이 번쩩 든다.
'하나, 둘, 셋... 열!'
열까지 세고 냉탕에서 나온다. 그리고 다시 온탕으로. 이번엔 반신욕이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배꼽까지만 물에 잠기게 한다. 핑크색 문어 괄사를 꺼낸다. 작고 귀여운 내 친구. 문어의 머리를 잡고 목 뒤부터 문지르기 시작한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여기도 좀 풀어줘.'
목덜미, 어깨, 날개뼈 사이. 핑크 문어 다리가 지나간 자리마다 뭉쳤던 근육이 스르륵 풀어진다. 정수리도 꾹꾹 눌러준다. 두피도 시원해진다.
문어가 꾹꾹 눌러줄 때마다 '아, 거기 거기'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핑크 문어와 나, 우리는 이제 완벽한 한 팀이다.
괄사를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뜨거운 물이 아랫배를 감싼다. 온기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속으로 스며든다.
긴장했던 근육들이 하나둘 풀어진다. 어깨, 등, 허리.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이제 쉬어도 된다고 다독이는 것 같다.
처음 대중목욕탕을 이용할 때는 부끄러웠다. 비루한 몸뚱이는 남들에게 보이기 민망했다. 처음 몇 달은 빠르게 샤워만 하고 도망치듯 탈의실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완벽한 몸은 거의 없었다.
근육질이지만 나이 때문에 살이 무척 처진 분, 허리가 무척 긴 분, 상체가 하체의 두 배인 분, 하체가 너무 가늘어 상체를 지탱하기 힘들어 보이시는 분, 나처럼 앞뒤 구별이 안 가는 분도 계셨다. 모두가 불완전했다. 그래서 오히려 편해졌다.
"맨몸으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사회적 지위나 소유의 많고 적음 따위는 수증기처럼 흩어진다."
_ <아무튼, 목욕탕> 중에서
열탕이 주는 건 몸의 온기만이 아니었다. 나만 부족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도 온기를 주었다. 얼굴에서 땀이 흐를 때,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던 것들도 함께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처음엔 수영이 좋아서 수영장에 갔다.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 호흡을 참았다 내쉬는 것,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목욕의 맛을 알게 되었다. 수영 후의 열탕, 사우나, 냉온탕 번갈아 들어가기. 이 모든 과정이 주는 이완과 회복의 기쁨을.
가끔은 열탕에 몸을 담그기 위해, 수영을 하게 되었다. 수영이 목적이 아니라 목욕이 목적인 날도 생겼다. 그래도 괜찮다.
수영이 좋아서 목욕도 좋아졌고, 목욕이 좋아서 수영도 더 좋아졌으니까.
천천히 욕조에서 나온다. 핑크 문어를 행궈서 가방에 넣는다. 몸도 마음도 온기로 가득하다. 탈의실로 나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볍다.
"내일 또 올게."
목욕탕 문을 나서며 속으로 작은 인사를 건넨다. 목욕탕이 있어서, 수영이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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