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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유리한 종목이 있다

골골거려도, 이 몸 그대로 괜찮다

by 맛있는 하루


수영에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단 네 개의 종목이 있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수영을 처음 배울 때였다. 자유형과 배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몸으로 하는 건 다 서툰데, 유독 발차기도 자세도 훌륭하다며 강사님이 시범조교로 자주 세우셨다.


"배영 팔 돌리기할 때 귀에 스치도록 회전하세요. 시범조교 나오세요."


"와, 정말 폼이 좋으시네요."


어차피 모두 초급반이라 실력이래봤자 도토리 키 재기였겠지만, 칭찬을 받으니 어깨가 으쓱했다. 수영에 이 한 몸 바치리라 다짐도 했다.




그.러.나.

평영 발차기를 시작하자, 고문관이 되었다.


"아아악!"


"아니, 회원님 왜 그러세요?"


"평영 발차기만 하면 골반과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혹시 허리디스크 있으세요?"


"네. 퇴행성 변형디스크로 치료 중이에요. 수영도 재활 목적으로 시작한 거고요."


"아… 회원님, 아무래도 평영과 접영은 무리실 것 같네요. 자유형과 배영만 하셔야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고 오세요."


청천벽력이었다. 역시나 의사도 평영과 접영은 절대 금물이라 하셨다.


다른 이들이 우아하게 평영을 할 때, 나는 어푸어푸 배영을 했다. 남들이 접영으로 물살을 가를 때, 나는 자유형을 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맨 앞에서 물살을 헤쳤다는 것이랄까. (강습반 1번은 나름 권위 있는 자리다. ^^;;)


이미지 출처: pexels.com


동기들의 접영이 완성되어가며, 수영과 뼈를 묻으리라던 나의 열의는 점점 식었다. 우아한 평영을 눈으로만 바라보다, 결국 수영을 그만뒀다.




그로부터 20년 후,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여전히 자유형과 배영뿐이었지만, 다시 물을 가르는 그 느낌이 좋아서 '평영 포기자'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와, 수영 잘하시네요. 수력이 얼마나 되세요?"

어느 날, 옆 레인 분이 물으셨다.


"음, 글쎄요. 아주 오래전에 10개월 정도 배웠고, 다시 시작한 지는 일 년 반쯤 됐어요."


주구장창 자유형과 배영만 하다 보니 속도는 더 빨라졌고, 힘은 덜 들었다. 실력이 좀 늘었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칭찬을 받으니, 물속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수영을 즐기는 남편이 말했다.


"오늘 접영 잘한다고 칭찬받았어. 이제 접영은 1번 주자가 됐는데… 근데 왜 이렇게 배영이 안 되지? 배영만 하면 어르신들보다 더 느린 것 같아. 왜 그러지?"


"다리가 가라앉나 보지. 이상하게 남자분들 중에 배영만 유독 느린 사람이 많더라. 그런 분들 보면 다리가 물 아래로 많이 처져 있더라고."


"음, 그런가? 희한하네. 몸을 유선형으로 만든 것 같은데 왜 안 되지?"


그 순간,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유리한 종목이 있다는 것을.


누구는 접영이 주 종목이고, 또 누구는 배영이 주 종목이다. 네 가지를 모두 어렵지 않게 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두 가지만 가능한 사람도 있다. 각자의 몸마다 유리함과 불리함이 있으니까.




못하는 것만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인정하다 보면, 어느새 골골거리는 이 몸과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퇴행성 변형 허리디스크, 목디스크, 하지정맥류, 족저근막염, 만성 위염, 난소낭종, 자궁근종, 심장질환…


골골골, 골골골.

골골대는 병명이 참 많기도 많다.


그럼에도 골골거리는 이 몸, 이대로도 좋다.


평영 못 해도 괜찮다. 접영 못 해도 상관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오늘도 물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물은 내 불완전함을 묻지 않는다.


불완전한 이 몸으로, 완전한 행복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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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