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패킹 수경과의 일주일 전쟁 예고
수영복은 여러 번 바꿨다. 늘어나고 낡아서. 그런데 물안경은? 한 번도 교체한 적이 없다. 뿌옇게 변한 시야를 되살려준 김서림방지액 덕분이었다. '이 수경과 함께 할머니가 될 때까지 가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내가 수경을 바꾸기로 결심한 이유는 고무 패킹 때문이었다. 아니, 덕분이었다.
오래된 패킹은 탄력을 잃었다. 쫀쫀한 느낌은 사라지고, 수경 안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눈알이 수영장 물로 세수하는 느낌. 이해되시는가?
그렇게 신상 수경에 대한 쇼핑 욕구가 뿜뿜 일었다.
그런데 이런! 쇼핑을 너무 오래 안 했나 보다. '성인 여성용 수경'이라고 검색해서 색깔만 고르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수경에도 이렇게 종류가 많다니.
패킹 수경과 논패킹 수경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미러와 노미러는 또 뭔가. 육지 옷 쇼핑력 제로인 아줌마는 물옷과 물장비 쇼핑력도 제로였다.
수영복만 고르던 수경 문외한이 검색을 시작했다.
패킹 수경: 고무 패킹이 있어 부드럽지만 다이빙 시 벗겨질 수 있고 자국이 오래 남는다.
→ 다이빙할 일은 없지만, 자국이 오래 남는 건 맞다. 오후까지 팬더 얼굴로 다닌 지 오래니까.
노패킹 수경: 시야가 넓지만 코받침 조절이 필요하고 박치기 시 통증이 있을 수 있다.
→ 회원이 적은 수영장이라 박치기할 일은 거의 없다. 일단 마음에 든다.
미러 수경: 빛 반사로 눈부심을 방지하고 간지 효과가 있다.
→ 가격이 좀 비싸다. 가격을 보니 눈부실 일이 뭐가 있을까. 간지 따윈 필요 없다고 중얼거렸다.
노미러 수경: 눈이 보여 시선 처리가 어려울 수 있다.
→ 노미러라도 눈 안 마주치게 뺑뺑이 계속 돌면 되는 거 아닌가.
이래저래 고민 끝에 팬더 얼굴이 되지 않고 가격도 저렴한 노패킹 수경을 선택했다.
배송을 받자마자 "어? 이거 뭔가 허전한데? 꼭 장난감 같은데?"라는 말이 나왔다. 패킹이 있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허전해 보였다.
하지만 신상 수경을 받았으니, 새 마음 새 수경으로 수영장에 간다.
"오늘은 자유형 3바퀴로 천천히 워밍업한 뒤, 쉬지 말고 7바퀴 연결. 그다음 딱 3초만 쉬고 배영으로 넘어가자."
우아한 백조가 된 듯 발걸음이 가볍다. 무대 위 발레리나처럼 쌓인 낙엽을 사뿐사뿐 밟으며 걸었다.
오늘따라 샤워기 수압도 딱 알맞다. 너무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게.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이제 수영장 물속으로 들어간다.
'슈______________________웅'을 예상했건만, 물에 들어간 지 2초 만에 "어푸푸" 하고 나왔다.
논패킹 수경 안으로 물이 가득 들어왔다. 처음엔 코끝 쪽부터 차가운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그러더니 급기야 눈 아래쪽으로 물이 철썩철썩 밀려들어왔다.
수경 안이 미니 수영장이 되어버렸다. 눈꺼풀을 간질이는 물의 감촉, 속눈썹이 물에 젖어 눈을 찌르는 느낌, 눈동자가 염소 냄새 나는 수영장 물에 직접 담가진 듯한 얼얼함. 눈알 마사지를 받은 듯 시원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눈 주변과 렌즈를 다시 맞췄다. 다시 입수!
처음엔 잘 맞춰졌나 싶었는데, 수경 안으로 물이 스물스물 들어온다. 이번엔 아예 렌즈 위쪽 테두리로 물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졸졸졸,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을 꽉 감고 25m 벽을 향해 전진했다. 벽에 닿자마자 "어거거걱!" 하고 일어섰다.
다시 코받침과 수경 끈을 조절하며 중얼거렸다.
'제발, 이번엔 물이 안 들어오길...'
수경도 양심이 있는지 25m를 잘 완주했다. 3바퀴째, 점점 수경이 눈 주위를 압박하는 게 느껴졌다. 물이 안 들어오게 하려고 너무 세게 눌렀나 보다.
다시 멈추고 수경을 조절했다. 한 바퀴 돌고 수경 조절. 또 한 바퀴 돌고 수경 만지기.
'수영복 코디의 완성은 수경이라고 누가 그랬나.'
'수경은 패션이 아니라 물이 안 들어오는 게 목적이잖아!'
혼자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중얼중얼거리며 샤워실로 나왔다.
거울 속에 펭귄 한 마리가 있었다. 노패킹 수경의 장점은 자국이 안 남는 거라고 했는데? 물이 자꾸 들어와서 수경을 꽉 눌렀나 보다.
우아한 백조의 모습을 그렸건만, 펭귄 오브 더 펭귄이 따로 없다.
'그냥 패킹 수경을 살걸. 이거 잘못 산 거 아닌가. 내일은 아들 수경을 가져와 볼까.'
집에 와서 아들 수경을 바라보며 내일 수영복 가방에 넣을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결심했다.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신상 수경에 기회를 주자.
이왕 산 거, 일주일만 더 씨름해 보자. 내가 논패킹 수경에 적응하나, 못 하나.
생각해 보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생전 처음으로 눈알 마사지도 시원하게 했고, 수경과 전쟁을 치르고 나오니 다른 날보다 운동량이 더 많아진 것 같은 긍정적인 효과도 있으니까.
모든 새로운 도전엔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도 그랬고, 자유형에서 배영으로 넘어갈 때도 그랬다. 노패킹 수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일은 논패킹 수경에 오늘보다는 더 적응할 수 있기를. 일주일 뒤엔 수경 수난 시대를 끝내고 수경 행복 시대가 찾아오기를.
그리고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된다면? 그땐 당당하게 패킹 수경을 다시 사면 된다. 실패가 아니라 경험이니까. 논패킹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은 펭귄 얼굴로 하루를 보냈지만, 일주일 뒤엔 우아한 백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펭귄도 나름 귀엽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고 일주일을 채워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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