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촐하게 네 군데만
번역가로만 알고 있던 권남희님의 <스타벅스 일기>를 읽었다. 스타벅스라는 한 공간에서 겪었던 일과 생각들을 적은 산문집을 읽다가 작가가 나와 똑같은 성향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집순이.
정말이지 집순이들이 집 밖에 나가면 힘든 이유다. 나간 김에 이것저것그것 다 해야 하는 습관 때문이다.
오늘의 주요 볼일은 종로에 있는 안과에서 정기 검진을 받는 것. 한 번 외출할 때 한꺼번에 볼일을 보는 것이 전 세계 집순이들의 특징이 아닐까.
오늘도 볼일은 많지만, 조촐하게 네 군데만 들르기로 했다. 1) 종로에 있는 안과에 갔다가 2)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 기운 쐬고 3) 디타워 스타벅스에서 원고 한 편 쓴 뒤, 4) 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서 장보기.
나간 김에 볼일 한꺼번에 본다고 교보문고에서 출판사 네 곳과 연속으로 미팅하고 몸살 나서 열흘도 더 아팠던 기억이 나네. 사람 만나는 일은 한꺼번에 하면 안 된다.
_p.198, <스타벅스 일기>, 권남희
조촐하게 네 군데만.
나간 김에 볼일 한꺼번에 본다고.
완전 극공감한다.
집 밖을 나가는 것이 제일 어렵다. 그러니 나간 김에 볼일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나갔다 오면 더욱 지친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간 김에 하지 않으면 다음번 나간 김에로 미뤄진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보다야 나간 김에 하고 넉다운 되는 편이 낫다. 그래서 집순이들은 빨리, 후딱 나간 김에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오늘의 수영장 나간 김에 목록이다.
1. 오전 수영 가는 김에
2. 책 사진 찍기
3. 도서관 책 반납하기
4. 병원 진료받고 약국까지
5. 학원비 결제하기
수영장에 가는 날은 마치 미션을 수행하는 날 같다.
"오늘은 딱 다섯 군데만."
스스로에게 말한다. 수영복과 수경이 든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 세 권을 챙긴다. 병원 예약 시간을 다시 확인한다. 학원비 결제는 마지막 순서로.
수영을 끝내고 나면 몸은 개운하지만 머릿속에선 벌써 다음 목적지가 깜빡인다.
"책 반납은 도서관 방향이니까, 병원 가기 전에 들르고."
"약국은 병원 바로 옆이니까 괜찮아."
"학원은 집 가는 길목이니까 문제없어."
나간 김에의 논리는 완벽해 보인다. 적어도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며 걷는 길.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오히려 무겁다. 하지만 목록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이상한 성취감이 든다.
"3번 완료."
"4번 완료."
체크 표시 하나가 주는 기쁨이란. 집순이에게 외출은 전쟁이고, 체크 표시는 훈장이다.
마지막 목록까지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향한다.
골목길 은행나무가 오늘의 수영과 나간 김에 목록 완수를 칭찬하며 노란 물결 박수를 쳐주는 것 같다. 청룡영화제 레드카펫을 본따, 스위트 홈 황금빛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마침내, 집으로. 환영합니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간 김에 목록은 완수했지만, 몸은 이미 녹초다. 소파에 쓰러져 천장을 보며 생각한다.
"내일은 집에만 있어야지."
하지만 안다. 내일도, 모레도, 나간 김에 목록은 또 만들어질 거라는 걸.
집순이는 그렇게 산다. 집 밖을 나가는 게 제일 어렵지만, 나간 김에는 꼭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안도하며 다짐한다.
"내일은 수영장만 갔다 오자."
하지만 그 다짐은 또 다음 나간 김에로 미뤄질 것이다. 그게 집순이의 운명이니까.
집이 제일 좋은 집순이.
집 밖은 무섭지만, 수영장은 좋다. 물속에선 목록 따위 없으니까. 그저 물과 나, 호흡과 팔다리만 있을 뿐.
그 짧은 순간만큼은, 나간 김에를 잊는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수영장에 간다. 그곳만큼은, 나간 김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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