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by 블록

친구 L의 집에 놀러간 날, 나는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충격에 빠졌다.


그 이유는 집이 무지막지하게 커서도, 신기한 것들이 전시되어있어서도, 너무 작아서도 더러워서도 아니었다. 내가 충격받은 이유는 친구의 집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인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친구나 지인, sns를 통해 건너다 본 사람들 중에도 인형을 수집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인형 뽑기의 인형들을 한곳에 쌓아놓는다거나, 치이카와 시리즈를 사 모아 전시한다거나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를 통해 나온 결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L의 집에 있는 인형들은 달랐다.


딱 봐도 일관성 없는 종류, 어디서도 보지 못한 브랜드나 이름 없는 인형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이곳 저곳에서 끌어다 모은 것들, 그리고 아무런 고민 없이 집어온 것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가 이렇게 많은 숫자로 존재할 리가 없었다.


이 작은, 1세제곱 미터의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 가벼운 물체들이 탁상, 구석의 선반, 피아노, 방문 앞 할 것 없이 줄줄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채우는 공간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채운 공간의 값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들이 채울 수 있었던 공간의 값은 얼마나 될까.


나는 물었다.

"인형이 왜 이렇게 많아?"

L은 대답했다.

"동생이 좋아해."

아무런 거리낌 없는, 그냥 좋아하니까 샀다는 대답이었다.


그들은 단지 '좋아한다'라는 이유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 뼘 손바닥에 겨우 들어가는 5만원짜리의 인형들로 집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걸 걱정 없이 모두 시켜줄 수 있다. 나는 이런 광경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절약,

티끌 모아 태산.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배운 속담과 미담은 절약과 저축을 강조했다. 그 교육이 만들어낸 사회상인지, 내 주변의 가정들은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일단 아꼈다.


우리 집은 금전적으로 쪼들리지는 않았지만 돈을 아끼자는 신념은 언어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도 시간의 곳곳에 배어 있었다. 엄마는 "어우, 뭐가 이렇게 비싸?"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이 한 마디가 붙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살 수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이것은 나의 일상이었다.

내 친구들의 일상이었고,

우연히 인연을 맺은 지인들의 일상이기도 했다.


우리는 매번 아끼라고 교육받았지만 사실 과자 한 갑을 200원 싸게 사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차피 살 것이고 살 수 있음에도 "비싸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건 문화적 잔상일까? 하지만 사회 곳곳에 깃든 아끼라는 가르침을 거스르고 그 반대를 외치기엔 용기와 확신이 없었다.


L의 집에 전시된 인형을 보고 나는 그들의 재력에 충격받았지만, 동시에 그때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이래도 되는구나.

사고 싶은 걸 사도 되는구나.


비로소 당연하다 의심했던 생각에 확신을 줄 증거가 생긴 순간, 의심은 질문이 되어 나타났다. 금전적으로 부담할 수 있다면 굳이 아껴야 할 필요가 뭘까?


물론 당장 내 금전적 상황이 그렇게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날 내가 깨달은 것은 언젠가 올지 모를 가능성에 대한 것. L의 집을 보지 않았다면 언젠가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비싸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케임브릿지를 가기 전 내 모든 지인들은 그런 금전적, 문화적 상황에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비싸고 작은 인형을 매번 살 수 있는 상황을 직접 경험 혹은 목격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꼭 아끼지 않아도 되는 것. 고민 없이 가지고싶은 걸 모두 사는 삶이란 나는 살아보기는커녕 구경해본적도 없는 것이라 생각해보면 얼마나 당연하게 가능한 일인가를 깨닫는 것은 충격적일 정도였다.


어딜 가나 편하다는 이유 하나로 비즈니스를 타는 것, 아무 거리낌 없이 아무 레스토랑에나 가고 아무 음식이나 시키는 것, 무엇을 좋아할지 모를 딸을 위해 기념품샵에서 세 종류의 인형을 사는 것. 모든 행동에 고민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L의 집은 예쁘게 꾸며져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좋은 물건들을 사용했고 좋아하는 물건들이 넘쳐났다.


그런 삶도 있구나. 내가 경험한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구나.


L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기에 나는 무의식 속에 배어있던 강박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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