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변명

by 블록

항상 시간에 쫓겼다.


1학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1년이었다. 과제는 항상 밀려있고, 공부를 할 시간도 부족한데 소셜, 인간적 성장, 열등감 극복, 이벤트 확인 등 해야 하거나 강제로 하게 되는 일은 또 어찌나 많은지.


하지만 가장 날 힘들게 한 것은 주변 친구들은 잘 살아가는 것 같았다는 사실이었다.


대학에 처음 들어가면 FOMO(Fear Of Missing Out: 사람들이 나 빼고 재밌는 시간을 보낼 것 같은 불안), imposter syndrome(가면 증후군) 조심하라고 어찌나 광고를 해대는지 모른다. 그만큼 같은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선배들은, 교수들은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옆 사람이 괜찮은 게 현실 같아 보이면 세간에 떠도는 와닿지도 않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기란 쉽지 않다.




Natural Sciences학과의 특징은 전공이 1학년때부터 정해져있지 않다는 점이다. 입시는 생물 계열과 물리 계열을 나눠서 하지만, 입학 이후에는 물리로 입시를 한 사람도 생물을 선택할 수 있다.


1학년 때는 화학, 물리, 생리학, 진화, 세포과학, 지구과학, 재료과학 7개 중 4개의 과목을 고를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생물을 공부하지 않았는데, 생리학을 골랐다. 모르니까 더 열심히 할 거고, 더 빨리 배울 테니까. 애초에 그게 이 과에 진학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나의 짧은 생물 지식은 전부 한국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영어로 된 전문 용어를 강한 영국 발음하는데 받아적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내가 뭘 아는지 뭘 모르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외국인 학생으로, 그것도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로 인간들을 만나는 건 쉽지 않았고, 기가 많이 빨렸다.

나는 뒤쳐졌고, 허덕였다.


분명 힘들었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어도 친구 잘 사귀고 수업을 잘 따라가는 외국인 학생들은 많고, bio를 듣지 않고 와서 수업을 잘 듣는 학생도 많았다.


'변명하지 마.'


머릿속에 울렸던 문장은 만화에서 봤을, 고지식한 자기계발서에서 봤을법한 대사.


타인들은 같은 상황에서 잘 해나간다는 것과 내가 대는 이유들이 변명일 뿐이라는 것은 동치. 그들은 하는데 내가 못하는 건 분명 내가 모자란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에게 모양빠져보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때의 나는 힘들다는 말을 삼켰고 힘든 이유는 눈을 가리고 뭉개버렸다.


하지만 커가면서 확실히 깨달아가는 것은, 지식이 쌓일수록 알아가는 진실은 것은 그와 반대다. 진짜 변명이란 존재한다. 그리고 나처럼 어리석은 대학교 1학년만이 그 사실을 모른다.




케임브릿지에 가서 가장 놀란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유한 배경을 가졌는지였다. 유학생들은 강의에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다닐 수 있는 갑부들이 대다수였고, 영국 학생들도 기숙형 사립학교인 보딩스쿨을 졸업한 경우가 눈에 띄게 많았다. 분명 그런 학교나 집안 배경은 보편적이지 않을 텐데도 캠브릿지에서는 평균을 구성했다.


명문대는 똑똑한 애들을 데려가는 선택집단이라고 생각했고, 돈과 관계 없이 똑똑하기만 하면 진학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똑똑한 명문대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내 동기들이 대부분 '돈 많은 집안 자제'로도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똑부러지는 학생들이 돈이 없어 여기에 못 오고 있단 말인가? 명문대 학생이 똑똑한 것은 맞지만, 모든 똑똑이들이 명문대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나는 대학에 오고서야 깨달았다.


기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에 대해 말하는 옥스포드 union에서의 연설이 하나 있다(원본을 못 찾아서 인스타 링크를 달아둔다). 영상 속 교수의 말에 따르면 영국은 7%의 학생들이 사립교육을 받는데, 옥스포드 학생들은 40%가 사립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80%가 의미 있는 특권층의 자제다. 미묘하게 경험하기만 했던 비율을 수치화해서 말해주니 속이 시원했다. 사실 이 영상이 내가 조금씩 깨달은 모든 것을 정리한다.


기회는 불공정하다.

그건 내 변명이 아닌 사실이다.


기회 뿐 아니라 그 무엇도 마찬가지.

어디가 내 노력의 부족인지, 어디가 잘못된 선택에서 기인한 예견된 결과였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를 아는 것 또한 능력이다. 이런 진짜 변명은 "네가 하는 건 변명이야"라는 말 한마디로 지워지지 않고, 지워서도 안 된다. 그래야만 마땅한 곳에 노력할 수 있게 되니까.


애초에 변명과 이유라는 단어가 왜 따로 존재하겠는가? 나는 당당하게 이유를 말하는 방법을 몰랐고, 변명과 이유의 경계를 가르는 법을 몰랐다. 그러니 모든 이유를 변명으로 취급하면서도 그것이 내 인간적인 부족함의 결과라는 사실은 모른 것이다. 학문적 부족함만을 잘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적 부족함 또한 채우는데 시간과 노력이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받지 않는다고 중요하지 않다 생각하는 건은 오산이다.


1학년 때의 나는 모양이 빠질까봐 내가 힘든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사실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어 비교할 수 없는 우리를 아주 작은 교집합만을 가지고 전체를 비교하려 했다.


하지만 변명해도 된다.

불이익을 받았을때, 공정함을 요구하진 못할지라도 불평정도는 해도 되는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니까.

모든 것이 내 탓은 아니다. 그게 진짜 변명이라면, 그건 변명이 아닌 이유다.


그러니 진짜 변명은 하자.

그것이야말로 진짜 성숙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keyword
월, 화, 목 연재
이전 20화목적 없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