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고,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한' 매일매일의 투쟁
남편에겐 자주, 딸에겐 가끔, ‘귀엽다(?)’는 말을 듣는데 내가 ‘서툴고 코믹하다 ‘는 뜻으로 이해된다.
학창 시절, 난 ‘집 밖에서 웃기는 아이‘ 였다.
’ 집 밖에서‘ 가 중요한데, 부모님은 유머하고는 담을 쌓으신 분들로 유머가 유통되는 집안이 아니었다.
가벼운 농담이 오해가 되기 일쑤였으니 말조심은 기본이었으니까.
아빠는 욕심이 많으신 분으로 늘 ‘요구’가 많으셨고
엄마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분이라 '지적'에 강하셨다.
쉰이 넘었지만 난 지금도 아빠가 어렵고 엄마는 무섭다.
위로 오빠가 하나 있는데 걔는 또 왜 이리 똑똑한지…
난 지금도 내 초등학교 입학식을 잊지 못한다.
입학식이 끝나고 교무실에 불려 간 8살 꼬맹이에게
교육기관이 던진 첫 질문은,
“너도 오빠처럼 잘할 수 있니?”였다.
이렇게 시작된 ’오빠 따라잡기‘ 아니 ‘좇아가기’는
부모님껜 실망을 안기고 나에겐 낮은 자존감을 남기고
실패로 끝났다.
나를 의사로 만들고 싶으셨던 아빠는 의사가 좌절되자
교수로 밀어붙이셨지만 그마저도 내가 중도에
학업을 접고 결혼해 버리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아빠에게 난 ’끝까지 뭘 해내지 못하는, 싫증을 잘 내는 인간‘으로 멈춰 버린 것.
아빠, 엄마, 오빠 앞에선 예나 지금이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도망치듯 결혼을 했는데 글쎄 이 남자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가장 큰 축복’ 이
굳이 ‘나’ 라고 말을 한다. 뭐지?
립서비스의 강자, 이 남자의 말을 내가 믿어야 하나???
난 이 남자를 ‘늘푸른 소나무’ 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그가 한결같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들만 사형제인 집안의 막내인데
놀랍게도 아주버님들이 모두 소나무다.
내 아들과 부부의 연을 맺을 누군가도 계 탔다고 본다.
엄마는 아들을 알아본다, 아들도 확실한 ‘소나무과’ 다.
남편은 내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인정, 내게 바라는 바가 없다.
난 주기적으로 남편에게 바라는 바를 요청하는데
물어도 물어도 자긴 없단다.
뭐지? 내가 그리 훌륭하단 말임? ㅋ
내가 뭔가에 관심을 보이기라도 하면 옆에서
사라고 사라고 강력 촉구하는 이 남자는
내가 물욕 없는 여자란 걸 진작부터 알아챈 걸까? ㅋㅋ
나의 모든 버전의 망설임에 확신과 응원을 보태주는가 하면
내 실수와 허술함을 ’귀여움’으로 소화해내는 사람!
난 이 남자와 있으면 숨이 쉬어진다.
아들, 딸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키웠고 지금도
‘자신이 되기 위한 그들의 모든 탐색과 노력’을 지지한다.
이제 지경을 넓혀 남의 집 아이들이 자기자신이 되는 일을 돕고 있는 나는
중년의 나이에도 ’내가 되기 위한‘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한‘ 매일매일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되고 나 자신’으로 사는데 늦은 나이란
있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