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지금은 안 되겠어
이 꼴 저 꼴 본사이
지연은 며칠 동안은 택시운전사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학원도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지연의 부모님 방에서 두 분이 언성을 높이시는 소릴 들었다. 지연은 갈 때도 없으면서 그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부촌이 자리 잡은 지연은 동네는 총을 멘 경비원들이 지킨다. 치안도 좋지 않고 갈 곳은 없었지만 지연은 동네 근처를 천천히 걸었다. 그때 뒤에서 계속 누군가 따라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태민이었다. 언제부터 따라왔는지 모르지만 태민은 거기 있었다. 태민과 지연은 걸었다. 동네 골목 맨 끝쪽에는 태평양 바다가 보이는 벤치들이 몇 개 있는데 둘은 거기에 앉았다.
지연은 태민에게 그동안 했던 말들을 또 할 힘도 없었다. 태민도 오늘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지연은 언제부터 태민이 자신을 쫓아왔는지 묻지 않았지만 지난 도움에 대해 태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 지난번에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
"......." 태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연은 태민의 눈을 보았다. 태민의 눈에는 금방 흐를 것처럼 두 눈 가득 눈물이 차 있었다. 지연은 당황했다.
" 무.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
태민은 태평양 바다는 한 껏 내려다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저에겐 이복 여동생이 있어요. 김윤희. 그게 내 이복 여동생 이름이에요. 난 윤희를 무척 좋아해 죠. 아직 아이니까. 우리 아버지가 다른 분과 낳은 나이 많이 차이 나는 여동생입니다. " 뜻밖의 이야기에 지연은 아무 말하지 않고 태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 여동생은 좋지만, 아버지와는 무척 사이가 좋지 않아요. 유명 방송사 PD였던 아버진 새어머니를 만나 모든 걸 버리고 페루로 이민오 셨죠. 어린 저는 이유도 모르고 쫓아오게 됐죠. 아무도 없고 다른 나라 말을 쓰는 나라에서 적응하기 참 힘들었어요"
" 그런데 왜 이런 말을 제게... " 지연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 저번에 지연 씨도 지연 씨 마음에 있는 답답한 이야기 하나 했으니까. 나도 하나 해준 거예요. 공평하게."
태민은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지연에게 물었다.
" 샹그릴라랑 꼬치 먹으러 갈래요? "
지연은 말없이 태민과 동행했다. 사실 지연은 샹그릴라가 뭔지 모르고 태민을 따라나섰다. 지연을 차에 타우고 마치 여행 가이드가 된 것처럼 태민은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며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로 차를 몰았다. 언덕 위에는 신기하게 생긴 레스토랑이 있었다. 둘은 샹그릴라를 시키고 꼬치도 시켰다. 그제야 지연은 물어봤다.
" 샹그릴라 그게 뭐예요? 난 한 번도 안 먹어 봤는데 "
" 페루 포도주라고 할까? 먹어봐요 향긋하고 달고 맛있어요. 이 꼬치는 무슨 꼬치인 줄 알아요?
" 아뇨."
" 한국으로 치면 닭똥집이에요 "
지연은 적색 포도주 색깔의 샹그릴라 잔을 들어서 맛을 보았다. 진짜 포도주 비슷한 것이 아주 달고 향긋했다. 레몬도 넣어서 먹으면 더 맛이 있었다. 지연과 태민은 말없이 샹그릴라 잔을 부딪혔지만 운전을 해야 했기에 태민은 마시지 않았다. 지연의 머릿속에는 앞에 앉아있는 태민보다 승빈이 생각에 속이 답답했다. 그렇게 홀짝홀짝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한 하라를 다 마셨다. 달콤한 맛에 먹다 보니 약간 취한 지연은 태민에게 말했다.
" 태민오빠!"
".... " 지연 씨 취했어요?
" 아니, 뭐 어차피 나이도 많고, 나도 구해줬고, 남자친구한테 보기 좋게 이별통보 당한 것도 알고 이 정도면 말을 놔도 되겠다 싶어서요. 안 돼요? 안되면 말고..."
지연은 태민보다 앞서 걸었다. 태민은 말없이 지연의 뒤에서 걸었다. 시간이 지나자 샹그릴라의 취기가 올라 올라온 지연 앞에 5 거리 광장에 있는 분수대가 보였다. 자연은 분수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분수대에 걸터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지연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태민은 지연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민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거리를 두고 지연이를 바라보고 기다려 주는 것뿐이었다. 지연을 울다가 무심코 아직도 끼워져 있던 승빈과 나누어 끼었던 커플링을 보았다. 술을 마쳐서 부은 지연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지연은 화풀이가 하고 싶어졌다. 울다 말고 일어난 지연은 반지를 확 잡아 빼고 분수대 저 멀리로 던져 버렸다. 태민은 지연을 바라보았다. 지연을 말리려고 했으니 지연의 동작은 워낙 빨랐고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지연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한 참을 더 울었다.
얼마만큼 시간이 지났을까 지연과 태민은 어느새 지연의 집 앞에 와있었다. 지연은 술이 많이 깼는지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갔다. 태민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아까 지연이 반지를 던져 버렸던 분수대에 갔다. 날도 어두워지고 사람이 없는 분수대에는 더 이상 쏟아지지 않았다. 태민은 청바지를 걷고 분수대 물속을 걷기를 시작했다. 물에 젖지 않게 휴대폰은 분수대 가장자리에 빼놓고 태민은 지연이 커플링을 던져버린 방향 쪽으로 다가가 지연이의 커플링을 찾기 시작했다. 분수대는 넓고 반지는 작은데 쉽게 찾아 질리 없었다. 태민은 두 시간 남짓 찾다가 분수대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핸드폰을 보니 지연이에게 온 부재중 통화가 있었다. 전화를 걸려고 보니 벌써 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어서 잠시 망설였다. 그때 태민에게 지연이가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 오늘도 또 신세 졌네요. 어렸을 때 낯선 땅에 와서 힘들었겠어요. 이만큼 적응하고 학교도 다니면서 일도 하고 멋지네요. 잘 자요.'
태민은 잠시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고 다시 분수대 물로 들어가 반지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한편 잠들려고 했던 지연은 아까 분수에 던져 버린 커플링이 생각나서 잠이 오질 않았다. ' 그냥 빼서 서랍에 넣어 놓을걸..' 하는 아쉬움 마저 남았다.
아침 9시 정각 태민은 지연이를 어학원에 태워다 주기 위해서 지연의 집 앞에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어학원에 도착했고 지연은 7월 말 시험을 보았다. 시험을 다 보고 교실을 나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어학원 밖 잔디를 쳐다보았다. 지연의 스페인어 선생님과 태민이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지연은 다가가지 않고 그런 태민을 바라보았다. 스페인어 선생님 우르슬라와 태민은 이미 서로 알고 있는 듯 자연스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선생님과 태민의 이야기가 끝나자 지연은 태민을 아는 척했다.
" 아직도 안 가고 뭐해요? "
" 너 기다렸지. 시험은 잘 봤어? "
" 너? 뭐야 오빠라고 부를 때는 존댓말 하더니... 시험은 그럭 적럭 봤어요. 술 먹고 놀러 다니면서 뭘 바라겠어요. "
태민은 지연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차로 데려갔다.
" 오늘은 해장을 해야지? "
태민이 지연을 데리고 간 곳은 세비체를 파는 허름한 항구 옆 작은 식당이었다. 바다에서는 펠리컨이 어부들이 거두어들이고 정리해 놓은 그물에 걸려있던 물고기들을 먹고 있었다.
" 남자친구 아직 연락 없어? 커플링 던져 버리던데 후회는 안 해? "
"....." 지연은 차마 후회한다고 말하기 싫어서 조용히 있었다. 태정은 지연의 오른손을 잡아끌어 지연의 손바닥에 지연이가 버린 커플링을 올려주었다.
" 아.. 아니. 이게 어떻게? "
" 아니 거기다 버리면 페루아노 들이 다 가져가. 아깝잖아. 비싸 보이던데..." 하면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지연은 태민이가 다시 찾아준 반지를 가방에 넣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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