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이어도 좋아

세 가족

by 이도연 꽃노을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된 시점을 기억하나요?



엄마 아빠와는 언제 같이 살게 됐나요?


세 번째 심리 치료 수업에는 엄마 아빠와 같이 살게 됐을 때 이야기를 많이 하게되었다 그때 기분은 어땠는지 물어보셨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생생한 듯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6살이 막 되었을 때쯤 나는 엄마 아빠 얼굴을 처음 보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멋있고 젊은 엄마 아빠가 어느 날 고모네로 찾아왔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조그만 아이 배낭 하나에 다 들어갔던 내 옷가지 몇 개와 미미인형을 손에 들고 우리 가족은 고모네 집을 나와 인천의 한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마당 가운데는 펌프가 있는 수돗가가 있었고 마당 오른쪽으로는 큰 대청마루에 기와집으로 된 주인집이 있었다. 우리 집은 마당 한편에 조그만 마루가 딸린 슬레이트 지붕이 있는 단칸방이었다. 부엌도 마당으로 신발을 갈아 신고 가야 갈 수 있었고 화장실도 대문옆에 따로 있었다. 거미줄도 보이고 냄새가 나는 푸세식 화장실에 코딱지만 한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지만 나는 엄마와 아빠랑 같이 산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 신나고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엄마 아빠는 온 데 간데없었고 난 마당에서 작아진 세발자 전거를 미미 인형과 함께 타고 놀았다. 혼자 놀고 있으면 흰 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찐 할머니가 오셔서 내게 말을 걸어 주곤 하셨다. 그렇게 엄마 아빠가 모두 나간 후에는 나는 마당에서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던지 혼자 놀아야 했다. 우리 가족이 유일하게 다 모이는 시간은 깜깜한 밤이 다 되어서였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엄마랑 함께 누우니 불을 꺼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우리는 인천의 그 단칸방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또 서울로 이사를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청량리 근처에 있는 한 동네로 기억한다. 이사 간 집은 연탄집이 주인집이었고 우리 집은 연탄 창고 옆에 허름한 샷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집이었다. 반 한 칸에 장롱을 파티션 삶아서 뒤에 벽공 간에 책상이 하나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고 장롱 뒤편 그 공간에서는 아빠가 매일 무언가를 공부하고 계셨다. 장롱 앞쪽의 공간에는 엄마와 나의 공간이었다.





세 번째 수업에는 아빠와 엄마와 함께 살게 된 때를 떠올렸고 이사를 여러 번 다니던 기억을 하면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때 우리 집 방 풍경 그리고 내가 가지고 놀던 소품들까지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연탄보일러였던 당시였기에 맡을 수 있었던 미세한 연탄가스 냄새며 겨울이면 너무 추워서 방 한가운데 놓았던 연통식 난로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 그게 아니었나 보다. '


그때 나는 너무 어렸기에 아빠가 무엇을 위해 장롱 뒤편에서 공부에 몰두해야 했는지 왜 우리는 서울로 온 것 인지 잘 몰랐다. 어느 정도 눈치가 생긴 초등학생이 되고서야 알게 됐다. 엄마 아빠가 나를 낳을 당시는 두 분 다 20살이었고 아빠는 나를 낳은 후에 군대를 가야 했었던 것이다. 엄마는 3년이나 되는 아빠의 군대 생활 동안 돈을 벌어서 가족이 살기 위해 노력을 하신 것이었다. 돈이 모이는 것이 늦어져서 내가 6살이나 돼서야 허름한 단칸방에 모 여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 프로그램에서 하고 있는 고딩 엄빠가 생각날 정도로 우리 엄마 아빠는 어린 부부였던 것이다. 아빠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대학교를 가기를 결정하셨고 엄마는 우리 집에 재정을 이끌어가는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매일 3타 임의 일을 하셨다. 밤에도 엄마는 부업을 하느라 자는 둥 마는 둥 했고 그런 모습은 6살짜리가 봐도 꽤 고단한 삶 같아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의 부업을 돕곤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돕는다고는 했지만 더 일거리를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몇 주 간의 상담 동안 내가 처음으로 웃음끼 있는 얼굴로 이야기하는 6살 때의 기억을 상담 선생님께서 듣다가 눈물을 글썽이셨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가장 좋았던 기억이 그때였는데 선생님 눈가는 촉촉해지셨다. 가난이 무엇인지 사회생활인지 뭔지 모르고 그냥 엄마랑 아빠만 옆에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철부지 어린아이였기에..


나는 울지 않는데 상담가 선생님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니 내 마음도 아파왔다. 굵은 사포로 갈아 내는 것처럼 쓰라리고 따끔따끔했다. 그때 어렸던 내 기억과 모습이 슬픈 것이 아니라 '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주는 것인가?' 하는 처음 받아보는 따스한 마음에 나는 6살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괜찮은 척 나의 마음과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나 봅니다.
지금 일어난 일도 아닌데 마치 지금 일어난 일처럼 울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울고 싶은 날이 있겠지요?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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