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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n 20. 2024

깨진 연인

소설

  

 어떤 목소리― 내면이 깨진 사람아. 걸어라 두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남자는 부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괴물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난밤에 일어난 그 일을 떠올리면 정신이 멍해지고, 거울 속의 자신이 징그러워 보였다. 남자는 여자를 버리고 도망쳐 왔다. 남자는 여자와 한집에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여자에게 연락은 없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이대로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한다. 그러나 남자는 기억한다.

 

 어둠 속에서, 남자가 충동적으로 여자의 목을 움켜쥐었을 때, 단잠의 여운이 묻은 흑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떠진 것을. 남자는 약 삼초간 흑갈색 눈동자를 마주한 채 그대로 있었다. 아니, 지금 돌이켜보니 그 3초간 목을 움켜잡은 손에 상당한 힘을 주었던 것 같다. 여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놀란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 굳어버린 얼굴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하는 무지로 가득했다. 남자는 놀라 손을 뗐다. 서너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어둠 속에 여자를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남자는 후회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다시 멍해졌다. 후회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게 와닿았다. 후회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2년을 만난 여자를, 결혼이란 제도에 대한 근본적 회의감도 이기지 못한 어떤 무서운 끌림을 느끼게 한 예비 신부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남자는 땅을 치고 후회해야 했다. 그러나 남자는 땅에 주저앉을 수가 없었고, 자책의 감정을 쏟아낼 수도 없었다. 남자는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 뿐이었다. 여태껏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공허하고 두려웠다.


 남자는 방을 나와 묵묵히 캐리어를 챙겼다. 남자는 직업이 없었으므로 떠나는 데 자유로웠다. 아직도 사방은 푸른 새벽빛에 잠겨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새도 울지 않았다. 남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남자는 여자를 다시 만나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방법도 생각했다. 남자는 그 자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순간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견뎌야 한다는 건 알지만, 못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나인 줄 알고 살아온 자아가 무참히 짓밟히는 현장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남자는 지금까지의 모습대로 냉정하고 차분하게 짐을 쌌다. 남자는 허둥거리지 않았다. 짐을 다 쌌을 때,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남자는 조금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곧바로 여자의 얼굴과 지금껏 암기하듯이 떠올린 행복한 미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무거워졌다. 남자는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핸드폰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그 후로 남자를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남자는 간간이 친지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남자가 실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실종된 상태였다. 남자를 아는 사람 가운데 그 뒤로 남자를 만난 사람은 없었다.


 남자는 그 초여름 밤 이후로, 가까운 친지들에게 술에 가볍게 취한 목소리나 메시지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그래봤자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서너 명 정도였다. 남자를 찾으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히 남자도 돈을 구하기 위해 어딘가에서 궂은 노동을 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가 일을 관두면 남자는 금방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어느 후텁지근한 저녁 남자는 기차에 몸을 싣고 지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시 그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남자는 그사이 여자를 많이 생각했다. 여자의 조용한 성격, 상냥하지만 텅 빈 듯한 미소, 진심으로 웃기진 않아도 언제나 끊이지 않던 무난한 대화들, 여자의 배려들, 가끔 적극적으로 매달려오는 반전의 매력까지. 폭력을 통한 사랑의 확인이니 뭐니 하는 격정은 남자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남자는 오랜 고민을 해야 했다. 남자는 왜 그녀의 목을 조른 걸까. 왜 그녀에 대한 폭력적인 욕구를 느낀 걸까. 남자는 그사이 진지하게 고민했고, 처음으로 자해를 시도할 정도로 심적인 괴로움을 겪었다. 남자는 자신의 손목을 쥐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불행한 과거사가 청승의 가면을 쓰고 막 떠오르려 할 때, 남자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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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치즈, 회냉면, 참외 따위의 상품 목록을 훑었다. 다 배달시키고 싶었지만, 주소를 입력하기 싫었다. 식료품 사이트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도 자신의 주소를 남기기 싫었다. 남자는 한참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저물어가는 저녁을 바라보며 불행한 생각을 했다. 행복한 미래의 목을 움켜쥐고 흔들도록 만든, 범인의 얼굴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이혼한 부모님인가, 처음 피 터지게 싸운 친구인가, 아니면 감정의 말소를 일으킨 첫사랑인가. 남자는 그 색출의 과정에 너무나 열중하느라 쿠폰 만료 문자 밑에, 밑에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한 개를 읽지 못했다. 여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남자는 그날의 실수는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자신의 본성이라는 대답을 피하려고 의미 없이 정신을 소모했다.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남자는 문득 계속 떠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는 것보다 지금처럼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남자는 이 생활이 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집에 귀가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적막을 만날 필요가 없다, 여자를 만날 필요가 없다, 사랑을 나눌 필요도 없다, 아이를 가질 필요도 없다. 나는 자유롭다. 남자는 작은 전율을 느꼈다.


 남자의 구식 핸드폰에는 여전히 읽히지 않은 여자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어디야? 겹백합이 피었는데 네가 생각나.


 남자가 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연락이었다.

  




  여자는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남자가 자신의 모습을 통해 괴물을 보게 됐던 바로 그 거울이다. 여자는 거실로 나와 식탁에 놓아둔 화병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분홍색 겹백합과 장미, 카네이션과 거베라, 유칼립투스가 어우러진 거대한 꽃무리. 저토록 생기 넘치게 피었는데도 이상하게 무덤 같았다. 여자는 남자의 도망을 우아한 술래잡기의 제안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뜻 찾으러 나설 수 없었다.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술래가 되면 무엇을 희생해야 하지? 나의 시간, 나의 금전, 나의 정신, 나의 감정, 나의 사사롭고 즐거운 우정들…… 그래, 희생할 준비는 되었어. 그런데 여자가 망설이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내가 그 모든 걸 희생하여 쫓을 만한 사람인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남자의 조용한 눈웃음, 숨겨진 재능, 우울한 노래를 좋아하는 취향, 소극적인 다정함. 다 좋았다. 그런데 그게 사랑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여자는 남자의 조용한 눈웃음 없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들이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나?


 여자는 남자에게 졸린 목을 마치 제삼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더듬었다. 여자는 더 이상 자신이 남자의 예비 신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를 찾는다고 해도 행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냥 숨은 아이를 잡았다는 사실 그뿐이다. 이건 잡으면 죽여도 되는 술래잡기인가? 여자는 오랜만에 튀어나온 자신의 깔끔한 유머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죽일지 말지는 꽃잎 따기로 정하자, 그러면 이제 해야 하는 일은. 여자는 꼼꼼하게 가방을 싸다가 다 뒤집고 다시 좋아하는 책 몇 권과 옷과 돈을 챙겼다. 이 미래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엉성한 짐 싸기는 여자의 본모습이자 인간으로서의 단점 중 하나였다. 꼼꼼한 성격의 남자와 한 번 싸운 이후 여자는 꼼꼼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계획을 세우고 정리도 꼼꼼히 했다.


 여자는 현관 앞에서 너저분해진 집안을 바라보았다. 안녕, 행복한 과거야. 여자는 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무거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늦은 밤 남자는 묵직하게 출렁거리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해변에 앉아 있었다. 투박한 바닷바람이 남자의 얼굴을 스쳤다. 맥주병을 들고 있는 손목 안쪽에 상처가 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오른손으로 움켜쥔 다음 왼손을 겹쳐 힘을 주었다. 삼 초간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는가? 잔인한 미소를 지은 것만 같았다. 여자의 눈동자에선 괴로움이 내비치지 않았다. 괴로워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 앞으로 다가올 남자의 고통을 미리 동정하는 듯, 아니면 모든 걸 허락하는 듯 가만히 있었다. 남자는 이제 후회하지 않았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퐁당- 소리가 났고, 잔파도는 순식간에 남자와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연줄을 집어삼켰다. 이윽고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남자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기차에서의 전율을 불러내려 애썼다. 그러나 자유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아무런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러나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한심한 사고란 것은 알지만, 이런 처량한 신세가 자신과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실망했어? 내가 보기보다 괜찮아서. 남자는 바닷바람에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고요는 사라지고 다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진한 연애나 한번 해보고 싶구나. 남자는 이번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파도가 밀려가자 마음을 들볶던 욕정도 같이 쓸려나갔다.

 

 남자는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아무도 없었다. 철저히 혼자가 된 홀가분함. 이 악몽 같은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남자는 쓸쓸하게 빈 가슴에 밀려오는 파도가 사람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XX는 괜찮아졌을까.에서 출발한 생각은 그녀가 자신을 그리워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이고 도취적인 바람에 도달했다. 원래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비로소 본모습이 되며, 도저히 구제 불가능한 생각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술병을 들고, 어두운 해변을 천천히 거닐었다. 걷다 보면 누군가 같이 술을 마실 사람을 만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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