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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n 25. 2024

소유의 시학

단편소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고독했다. 너는 나의 처음이었다.


 “뭐 봐?”


 여행의 꿈을 자극하는 관광지 사진이 가득한 책자를 들여다보는 너에게 물었다. 너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응,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해서. 너는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더니, 묵직한 듯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 바다 사진으로 뒤덮인 면을 내게 들이밀었다. 부산 다녀올까, 이번 여름에? 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생기가 감돌았다. 너의 스스럼없는 제안이 나는 기뻤다. 하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너에게서 넘겨받은 여행 책자를 훑었다. 그러자 너는 자연스럽게 내 한쪽 어깨에 턱을 얹었다.

  

 “아, 하지 마.”


 예민하게 굴기는, 하고 너는 투덜거렸다. 가 어깨에서 떨어지자 나는 비로소 여행 책자를 읽을 수 있었다. 경비도 그 정도면 괜찮았고 무엇보다 여름에 바다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다. 내가 고지식한 건지는 몰라도 아직 연인이라는 사이로 묶이기도 전에 둘이 여행을 떠나는 건 부담이었다. 너에게 나의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어때, 갈 수 있어? 하고 네가 물었다. 나는 가고 싶었지만 동시에 가기 싫었다. 글쎄. 가면 재밌긴 하겠지만, 요즘 생활비도 부족하고. 하며 뜸을 들였다.


 너는 돈은 자기가 더 내겠다며 나를 설득했다. 과외비에 일일 알바 수입까지 합치면 꽤 쏠쏠하다고. 이러다 정말 부자가 돼버리겠다는 너스레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럼 그러라고 했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요즘처럼 생활비가 부족한 시기에 여행을 떠나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너에게 내가 이 여행에 최대한 무심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부족한 돈은 다 자기가 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자꾸 어긋나는 대화가 짜증 나서 툭 쏘아붙였다. 너 정말 부자야? 돈 많지도 않은 게 큰소리야.

 

 그러자 너는 큰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돈 많아, 심술꾼아.


 심술꾼?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건 있는 말도 아니잖냐고 대꾸하려다 그럼 끝도 없을 것 같아서 관두었다. 나는 공연히 기분이 뒤틀렸다. 너는 나를 누가 봐도 연인 대하듯 대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도장은 찍지 않았다. 그것이 너의 방식이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불안한 마음과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내 내가 잘못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꼭 그 단어가 필요한 건가? 그 단어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충분히…… 서로에게 자극이었다. 물론 연인의 대체어가 자극일 수는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다른 말은 퍼뜩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너의 서늘한 뺨을 때로 달아오르게 했고, 너는 때로 나를.

    

 때로 나의 눈빛을 달구었다. 나는 가끔 너를 뜨거운 눈빛으로 보게 됐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는 그 자극을 행동으로 실행한 적은 없었다. 나의 뜨거워진 가슴을 문질러주는 너의 손길은 없었지만, 나는 충분히 전에 없는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웃음을 보고, 누군가의 찌푸린 채 잠든 고된 얼굴을 보고, 누군가의 악몽을 꾸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그토록 동요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것을 나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겐 절대적 재앙과도 같고, 너에겐 미워할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은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너를 만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품고 있는 가슴을 어루만지기 싫었다.


 처음에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제껏,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후회가 됐다. 나에게도 잊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했다. 철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것도, 사랑할 자격이 없는 마음가짐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왜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 건가. 하고 자신을 탓했다. 결정적인 고백은 서로 차일피일 미루면서 연애 말기에나 해당하는 피폐한 감정들에 물씬 오염된 너와 나였다. 언제나 괴로운 건 당연히 아니었다. 너와 술을 마시는 밤이 좋았다. 너와 하는 산책도, 드라이브도, 맛대가리 없는 오믈렛도, 카드놀이도, 첫눈도, 벚꽃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부산 여행은 코앞에 다가왔다. 너와 나의 사이는 변화가 없었고, 달라진 건 실내 옷차림의 두께뿐이었다. 너의 집도 더웠고, 나의 집도 더웠다. 둘 다 가난한 자취생들이라 냉방비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집에선 열사병에 걸린 두 마리 사막 개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선풍기는 작년에 고장 났다고 말하자 네가 욕을 했다. 왜 욕을 하냐고 하자 너는 아차 싶었는지 미안하다고 잘못 나온 거라고 대꾸했다. 너는 내 앞에서 욕설을 뱉은 적이 없었는데, 이런 면도 있구나 싶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꽝꽝 언 쭈쭈바를 꺼냈다. 언제 사둔 건지 기억도 안 났다. 나는 그걸 가져가 너의 뺨에 대주었다. 아아, 시원하다. 잠깐 그러고 있어. 너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결 편안한 목소리였다.


 “그냥 틀어버려? 전기세가 까짓것 많이 나와봤자지.”

 “아냐. 시원해졌어. 이거면 돼.”


 너만 시원하잖아. 나는 괜스레 냉소적으로 대꾸하며 이번엔 너의 뒷목을 쭈쭈바로 문질렀다. 아아, 시원하다. 그래, 이거 좋네. 너는 큭큭 웃으며 나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와 너를 따라 웃었다. 너 돈 많다며, 집에서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있으면 되지, 왜 우리 집에 와 있냐. 하고 친근한 어투가 그냥 흘러나왔다. 너는 축축하게 젖은 뒷덜미에서 물이 한 줄기 흘러내리자 그것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여행비로 많이 들어가니까 이번 달은 절약해야지. 같이 가는 사람이 고고하게 끌려가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서 출혈이 꽤 심할 것 같다고. 나는 미소가 지어졌다. 거봐, 돈 없구만. 부자는 개뿔.


 “무시하지 지금?”

 “그럴 리가 있나. 너는 부르주아처럼 생겼으니 돈 많이 벌 거야.”


 너는 내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뺏어 들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나를 향해 가늘게 눈을 떴다. 제법 귀티가 흐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너 말이야, 생긴 게, 하고 입을 열었으나 이내 멍청한 실수란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뭐가. 생긴 게 뭐가. 하고 네가 꼬리를 잡고 늘어졌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너는 몇 번 더 나를 찔러보다 포기했다. 그러더니 일부러인지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래, 보고 있으면 속이 안 좋아지지. 알아, 못생긴 거. 사귀는 사람마다 그러던데. 내 얼굴 보면 없던 짜증도 생긴다고. 어떤 사람은 죽이고 싶다던데. 나는 경악으로 물든 얼굴로 너를 돌아보았다. 거짓말이란 걸 알면서도 속이 화끈거렸다. 너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지금 내가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제정신이야? 아무리 장난이라도 왜 그렇게 말해? 나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완전히 달랐다. 제정신이야? 내가 아름답지도 않은 것 때문에 괴로워하겠냐. 뚫린 입이라고 개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하네.


 나는 옆에 있는 쿠션으로 너의 입을 팍 때렸다. 그러나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거짓말도 과했고 나의 반응도 과했다. 나에게 쿠션으로 얻어맞은 너는 덧없는 웃음이 떠나지 않은 얼굴로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대며 말했다. 꼭 혼잣말 같은 말이었다. “가끔 느끼는 건데, 너는 가끔 나를 낳은 사람보다 더 나를 낳은 사람 같아.” 왠지 기분이 가벼워지는 말이었다. 너는 실제 너를 낳은 사람을 떠올리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너에게 불행한 경험을 심은 사람이란 건 같았으나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니 비교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잠시 너를 침묵 속에 방치하고 신체적인 분만과 심적인 분만의 차이를 생각했다. 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무의식의 표현 같았으나, 어째선지 내가 연애 상대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 같기도 했다. 우리는 의미 있는 대화도 없이 시시덕거리다 헤어졌다.


 [뭐 해?]


 백 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내가 먼저 자존심을 굽혔다. 밤이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자려고. 내일 기차 시간 늦으면 안 되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한참 고민 끝에 [응. 잘 자] 하고 보냈다. 누가 보면 다른 사람이랑 타는 줄 알겠다, 하고 용기가 부족한 자신을 나무랐다. 내일 여행이 기대된다고 한마디를 덧붙였어야 했나? 잔다는 말도 혹시 거짓말이라면 지금 만나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해버릴 걸 그랬나. 지금 너랑 있고 싶다고. 나는 머리를 싸맸다. 솔직히 여행이 기대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무언가를 하고 어딘가로 떠나는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설렘보다는 불편을 잘 감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였다. 예상되는 불편들을 떠올리다 보니 근본적인 의문에, 우리는 도대체 무슨 사이로 이 여행을 떠나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닿았다. 나는 답을 몰랐고 너는 잔다는 말로 나를 차단했다.


 [내일 나올 거지?]


 결국, 나는 최악의 수와 다름없는 메시지를 보낼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버렸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1은 지워졌지만 너는 조용했다. 나는 나의 지극히 사적이고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불안을 너에게 그대로 내보였단 생각에 얼굴이 화끈했다. 나는 핸드폰을 소파에 처박았다. 방바닥에 누워 부채로 열을 식혔다. 연인 사이에도, 아니 연인에 가깝지만 정확히 연인은 아닌 사이에도 나눌 수 없는 불안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걸 순간 깜박했다. 너는 나를 조금이라도 비웃겠지. 아아, 그냥 내일 확 나가지 말까. 분노와 창피가 섞인 부채질에서 거대한 나방의 날갯짓 소리가 났다. 나는 내가 왜 연인이라는 두 글자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걸 가진 다음엔 어쩌려고? 너는 그 두 글자의 소유가 빚어낸 결과라는 것이, 생각보다 덧없고 외롭다는 걸 알기에 욕심을 버린 건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까…….’


 내가 너의 마음을 어떻게 알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 그게 사람이 외로운 이유였다.

    

 나는 너희 두 사람의 패기와 집착과 슬픔이 빚어낸 격정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너희 두 사람의 사랑을 이길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내가 태울 수 있는 부분을 남기지 않고 너를 몽땅 태워버렸다. 네가 나와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던 수많은 밤에 네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 사람과의 연애, 비참했던 일들, 행복했던 일들, 정신적 고통, 자신이 죽은 날, 영원히 지속될 후유증, 미치도록 사랑했던 기억들, 미치도록 고독했던 시간들. 네가 말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너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너의 말속에서 빚어진 그 사람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려고 했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너는 그 사람과 이별한 날에 자신도 죽었으며 앞으로의 삶은 계속 죽은 채로 살 거라고 자조했다.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야.


 너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너와의 관계는 정말이지 고통뿐이다.


 그 사람과의 이야기를 듣는 건 연애에 있어 무지한 나에게 즐거움으로 작용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가끔 듣기가 힘들었다. 내가 왜 타인의 이토록 개인적이고 부끄러운 순간까지 알아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 너는 나 없이는 불안한 존재였다. 네가 그 사람에 대한 깊은 증오와 그리움을 대뜸 파격적인 방식으로 증명하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걱정한 나 역시 불안한 존재였다. 너와 나처럼 서로에 대한 배려 없이 가까워진 사람들이 또 있을까. 너는 그때 오직 충동에, 흔히들 말하는 어리석고 어두운 충동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나를 붙잡고 있었다. 너는 나 없이는 잠도 잘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나라고 너보다 나은 건 아니었다. 나도 배려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너와 같이 있고 싶어서 너의 술회를 오래 끌었다. 너의 가장 무르고 연약한 곳을 찾기 위해 이기적인 방향으로 머리를 썼다. 네가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네가 술을 꺼내기를, 나에게 털어놓을 괴로움이 가슴 한편에 아직 쌓여있기를 바랐다. 나의 역할이 옅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나는 결국 괴로움의 늪에 빠졌다.


 너를 보고 싶었다. 지금 네가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와 입을 맞추며 다른 생각을 해도 상관없었다. 네가 나쁜 인간이 돼도, 죄책감에 휩싸여도 상관없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킬 것처럼 내면이 긴장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너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함부로 얻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둘러싼 어둠을 느꼈다. 실체 없는 그간의 어둠이 아니라, 여덟 개의 다리로 사람을 옭아매는 문어나 몸집이 큰 개가 연상되는 어둠이었다. 나는 숨을 참았다. 금방 숨이 막혔다. 나는 숨을 토해냈다. 후텁지근한 더위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나는 서서히 질식할 것이다.


 나는 고독한 사람이야. 하고 너의 동정을 구하고 싶었다.


 왜 동정은 나만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을까?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났다.


 절대적인 재앙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것들, 날카로운 이빨과 가지런한 손톱과 어떤 대상이든 가볍게 담을 수 있으나 사실은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와 상대에게 스며드는 방법을 아는 모든 행동의 법칙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지독한 매력체가 눈앞에 떠올랐다. 너를 지금의 너로 빚어낸 존재. 지극히 섬세한 손길 끝에 예고 없이 뒤따르는 적당한 발길질. 제멋대로인 행동 하나하나에 숨겨진 너를 향한 애정과 관심. 나쁜 행동들과 다정한 위로들. 강렬함과 부드러움. 다른 사람이 줄 수 있는 행복과 불행에 대한 호기심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압도적인 존재감. 너의 완전한 행복이자 완전한 불행. 강렬한 악몽만이 아니라, 차분하고 사소한, 연인을 가장 연인답게 만드는 그런 사소한 추억까지도 부족함 없이 채워준 사람.


 그 지독한 존재와 나를 비교했다. 그 절망의 수준을 내 입으로 말하는 건 힘들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추억으로 얼룩진 사람을 진심으로 신경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사람의 고작 3년을 나의 30년으로 이길 수 있을까. 너는 남은 인생을 죽은 채로 살 거라고 했는데. 어느 꽃비 흩날리던 저녁에 너는 폐장 직후의 동물원의 쓸쓸함에 전염되어 그 사람과 말싸움을 시작했다. 너는 네가 뱉는 모든 가시 돋친 말들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는 하염없이 가벼운 기분이었노라고 말했다. 왜 어쩌다 그 사람의 뺨을 후려친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폐장 직후 동물원의 쓸쓸함 때문이었을까 지나치게 훈훈한 봄바람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기도 전에 너는 주먹에 맞아 쓰러졌다. 차라리 후련했다. 때리려면 이만한 힘과 정성은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머리가 핑핑 돌았지만 태연하게 일어났다. 녹슨 철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물었다. 아스팔트 위에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 있었다. 차라리 아름다웠다. 너는 타액에 섞인 피를 바라보며 연기를 내뿜었는데 그때부터 그냥 눈물이 났다. 이유를 몰랐다. 불행하지도 않았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다신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엉엉 울었다. 미련하게 굴지 좀 말아, 멍청아, 하고 위로해 오는 그 사람과 부둥켜안고,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아니다. 미련하게 굴지 좀 마, 사랑하는데 왜 그래. 라고 했었나.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하면 너의 고통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너는 내 눈에는 여리고 슬픈 존재로 보이지만, 실은 나보다 훨씬 거칠고 강한 존재인지도 몰랐다. 너는 그 훗훗한 공기 속에서 그 사람과 마주 앉아 저녁까지 다 먹고 헤어졌다.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꽃향기와 피 냄새가 뒤섞인 지옥 속에서도 너는 사랑하는 사람만 있으면 밥이 넘어가는 존재였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인생의 실패를 공공연히 인정하면서 말이다. 나는 네가 나를 어디까지 원하게 될까 생각했다. 네가 내 어깨 위에 나붓이 턱을 얹었을 때 나를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네가 나와 함께 어디까지 떨어지려 할지 궁금했다.


 나는 소파에 내던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자, 네게서 온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내일 나를 배반하지 않을 거냐는 의미가 담긴 연락에 대한 너의 답장이었다.


 [갓난이 같은 걱정이야. 너나 제시간에 와]

 [갓난이는 걱정이 없는 존재려나. 대충 어리다는 뜻이야]

 [이제 다 잊어볼게]

 [미안해 그냥]

 [아 시간 지나서 못 지운다. 술 마셔서 그랬어 미안해.]

 [이제 진짜 잔다. 내일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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