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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n 29. 2024

무제 조각

소설 연습

 

 고요한 밤 꿈을 꾸었다. 아름답고 신비한 꿈속 세계에서 나는 슬픈 결혼을 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결혼이었다. 탈속의 순수함만이 존재하는 결혼식에서 나는 행복하였다. 눈을 뜨니 오래된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가 현실임을 일러주었다. 제이가 없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엄숙한 고전을 읽거나 우울한 노랫말 따위를 짓고 있어야 할 제이가. 아니면 내 옆에서 근심이 떠나지 않은 창백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어야 할 제이가.


 술의 밤인가. 생각하며 방 밖으로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도시의 달을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룽지는 시야 속에서 제이의 얼굴이 몽환적으로 흔들렸다. 나는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제이의 녹색 눈이 나를 돌아보았다. 꿈속에서 나와 극도로 고요한, 그리하여 고독하기까지 한 결혼식을 올린 사람의 눈동자도 녹색이었다. 눈을 감으면 저 구슬픈 존재가 아스러질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감지도 못했다. 나는 불쑥 화가 났다. 내 안의 열정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있으나 마나 한 열정을,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그 거추장스러운 열정을. 나는 술이 고팠다. 직행을 두려워하는 열정이 답답해 마셨다. 


 취기가 슬쩍 오른 나는 우울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제이의 턱을 잡아 돌렸다. 제이는 그 사나운 뱀을 연상케 하는 녹색 눈으로 나를 덤덤하게 응시했다. 나는, 말이야. 솔직해지는 게 너무 힘들어. 내가 하소연하자 제이는 비웃듯이 그러나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이는 녹색 눈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불길의 징조라고 불리었고 부모에게도 내쳐졌다. 그윽하게 빨아들이는 그 녹색은 사나운 기운을 품고 있으며, 오래 들여다보면 내면의 평화에 금이 간다고 소문이 났다. 나는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낯선 것에 끌렸지만 끝내 그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고, 때론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나는 애초에 깨어있던 적이 있었나.


 제이의 갸름하고 서늘한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뒤부터 나의 현실 감각은 현저히 곤두박질쳤다. 덥지 않은 행복을 거머쥐는 꿈, 고요한 결혼식을 올리는 꿈이 그것을 증명한다. 제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좀 더 명확히 알기 위해 검지로 뺨을 쓸어본다. 서늘한 체온이 나의 따뜻한 피부에 스며들었다. 언젠가 제이가 지독한 회한과 자기연민에 빠져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지금처럼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와 만나는 동안 말을 거의 뱉지 않은 제이. 그 몇 마디의 서툰 자기표현에 담긴 뿌리 깊은 불신과 체념. 관조, 절제, 고독, 오만과 눈물, 나르시시즘과 애정 결핍, 언제나 유유자적하는 태도!


 사람은 어째서 사람의 애정만을 갈구하게 되는 걸까. 나는 줄기차게 사람의 애정을 갈구했으나 그것을 인지한 사람은 참 드물었다.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은 대상을 향한 직행을 두려워했고 멀리서만 애간장을 태우다 차츰 불길이 사그라졌다. 덧없는 어릿광대의 세월이었다. 달이 추락한다, 제이야. 붉은 화마 속에서 분노한 천사가 눈을 뜬다, 제이야. 멀리서 개떼가 몰려온다, 제이야. 따위의 불순한 추상을 늘어놓다 보니 제이의 말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취한 제이의 얼굴은 강제로 나를 솔직한 사람으로 돌려놨다.


 “네 목소리로 한 번만 내 이름을 불러주라.”

  

 제이는 꾸밈없는 진심에 대한 보상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짧은 생에 쌓인 고독과 울분이 전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 음성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욕심 없이 유영하며 살고 싶었다. 너의 녹색 눈은 언제나 내면의 평화를 망쳐놓지만 나는 그걸 감당하려고 태어났어. 그래서 말인데 결혼할까. 라고 말해버렸다면 제이의 표정은 좀 더 무거워졌을까. 나는 내면의 모든 거추장스러운 거짓과 가식이 허물어져 내리는 통쾌한 광경을 목도했다. 새로운 기쁨이 샘솟았고, 저절로 술이 들어갔다. 그러나 곧이어 쓸쓸함으로 다물어진 제이의 입술이 바라보이는 현실에 습윤한 절망의 공기가 비강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자조의 심정으로 그 입술을 살살 매만졌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빛이 흐트러진 건지, 제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룽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숨기며 손을 떼었다.


 악과 선의 절묘한 조화. 도덕과 배덕의 모호한 악수. 고고하며 위태로운 촛불의 흔들림이 내비치는 작은 혼. 나는 저 혼의 보금자리가 되고 싶었다. 제이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다시 읊조렸다. 처음 글자를 배운 아이처럼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무해한 입속에서 굴렸다. 내 이름은 사탕처럼 제이의 입에서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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