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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l 03. 2024

B급 연애

짧은 소설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그대가 나를 떠나도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그대가 나를 떠나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턴테이블 앞에서 나는 경쾌하게 리듬을 타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비가 추적거리는 우울한 날씨에 맞는 우울한 노래를 들으려다가 수납장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가수의 LP판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흥이 없는 분이었지만 어머니는 흥이 넘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좀 아이 같은 분이었다.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신 어머니는 당신의 흥을 좇는 본능을 철두철미하게 감추고 요조숙녀인 척을 하셨지만, 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아이스러움을 결점으로 보지 않았고 나중에는 슬쩍 귀여워하시기까지 하였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른답고 남성적인 아버지와 섬세하고 아이 같은 어머니의 조합은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물론 두 분의 식지 않는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나는 조금 외로웠지만, 그거야 다 지난 얘기다.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그대가 나를 떠나도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그대가 나를 떠나도

 

 지금은 두 분 모두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나는 언제나 가슴 한 켠에 부모님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를 의도치 않게 서운하게 만들던 부모님. 서로가 서로에게 일 순위였던, 지상에 정말이지 흔치 않은 별나라의 부부. 어머니가 임종 시에 마지막으로 부른 사람도 내가 아닌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그 냉엄하던 얼굴로 눈물을 쏟으며 어머니의 손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아프게 쥐었던 건지 어머니는 웃으면서 좀 살살 잡으라고 들릴 듯 말 듯 말씀하셨다. 나도 물론 펑펑 울었지만, 솔직히 나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일반적인 어머니들이 자아내는 그런 자비롭고 애틋한 이미지는 아니었기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지는 않았다.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동심을 가진 어른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에 가장 슬퍼한 건 당연히 아버지였다. 나는 직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데려가겠구나! 나의 반쯤 무섭고 반쯤 우스운 예측은 불과 삼 년 뒤에 현실이 되었고, 아버지는 결코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말씀 따윈 하지 않으시고 무게 있는 임종을 맞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거친 손을 붙잡고 울었다.

    

 그대는 나를 사랑할 수 없나요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나는 뺨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의 물비린내를 맡으며 커다란 LP판을 어루만졌다. 그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았더니 네가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 악 소리를 질렀다. 손으로 짚을 선반이 없었으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무슨 악마를 본 것 같았다. 아, 뒤에 욕설은 삼키고, 깜짝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문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잔뜩 놀란 나를 바라보더니 “그렇게 놀랐어?” 하며 은은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것이었다. 웃음에 박한 수준이 아니라 거의 웃음이란 걸 지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너의 입꼬리는 이번에도 가식적으로 가볍게 올라가 있었다. 놀랐냐고? 그래 놀라 죽을 뻔했다. 네가 이 시간에 들어온 순간 신나던 음악은 어둡고 끔찍할 정도로 나른한 선율로 바뀌었다. 나는 무의미한 밝음으로 전락한 음악을 서둘러 멈추고 너에게 어떻게 들어온 건지 물었다. 비번을 치고 들어왔단다. 저번에 사소한 일로 대판 싸운 다음 비번을 바꿨는데. 어떻게 알았지?

 

 “생일이던데. 내 생일.”


 나는 무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다. 네 생일로 해뒀지. 그럴 거면 왜 바꿨을까? 나도 참. 나는 괜히 무안하게 중얼거리며 너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너는 순순히 나를 따라 나왔다. 열어둔 창문으로 물기가 가득한 빗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너에게 꺼내야 하는 질문이 뭔지를 떠올리고 커피 물을 올리다 말고 너에게 물었다. 왜 왔어 갑자기? 너는 귓등으로도 내 말을 듣지 않고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빗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눈빛이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냥 온 건가.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비가 오는 게 싫었나. 나는 혼자 추측하며 두 사람의 커피를 탔다. 한 잔에서는 잔뜩 씁쓸한 향기가 올라왔고, 다른 한 잔에서는 은은한 우유 내음이 났다. 나는 씁쓸한 향기가 진하게 올라오는 커피를 너에게 건넸다. 커피를 좋아하는 너 때문에 나도 커피를 즐기게 되었는데, 내 몸은 카페인을 거부하는 건지 한 잔만 마셔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건강에 안 좋은 것 같았다. 그래도 너와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좋아서 한 잔 두 잔 억지로 몸에 쏟아 넣다 보니, 심장도 어느새 적응했는지 전처럼 힘들진 않았다.


 너는 커피잔에 든 시커먼 내용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한 모금을 마셨다.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인데도, 너는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너는 정말 답답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 답답한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나도 따지고 보면 악인이었으므로,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심리도 비슷한 걸까? 다들 네가 오만하다, 안하무인이다, 어렸을 때 사랑을 못 받고 자랐을 것이다, 라며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정작 네 앞에서는 잘 보이고 싶어 했다. 이제야 쓸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도 언젠가 너의 뒷담을 했던 적이 있었다. 먼저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그 말들에 공감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리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중에 너에게 그 부끄러운 일을 들켰을 때, 나는 네가 나를 그 무서운 경제력으로 손 봐주거나 권력으로 눌러버리거나 아니면 직접 손으로 가벼운 교육을 할 줄 알았는데, 너는 의외로 부드럽게 넘기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네가 다르게 보였다. 무심한 목소리로 묻던 “그래서, 그게 진짜 너의 생각이야?”라는 한마디가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건 내 생각이 아니었다. 두 번 다시 뒷말 따위 입에 담기 싫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잘못한 적이 없는데, 단 한 사람,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쁜 죄를 지었다. 나는 악인이며 나의 입은 이미 더러워졌다.
                                                                                                       
―육 개월 전의 일기  


 나는 우유를 탄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너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고는 신경질적인 기분을 누르려는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왜 연락을 안 하니. 나는 어? 하고 되물었다. 왜 연락 안 하냐고 묻잖아. 너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섬뜩했다. 응, 그게. 하고 변명할 거리를 생각하다 보니 네가 내 면전에 대고 짓씹은 협박이 생각났다.


 “그거야. 네가 먼저 연락하면 죽여버린다고 했잖아……”


 그 말을 믿느냐는 듯한 눈빛이 왜 나를 향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네가 보란 듯이 남은 커피를 바닥에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아, 뒤에 욕설을 이번엔 삼키지 못하고 내지른 뒤, 뭐하는데! 하고 소리를 지르자 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연락 좀 하라고. 섬뜩한 뱀의 눈알로 속삭이는 너의 기세에 나는 조금 굳었다. 그러나 끝이 젖어 들어가고 있는 하얀 카펫 때문에 애가 타서 알았어, 알았어, 사실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하고 다짜고짜 너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너를 바라보았다. 너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하고 네가 미약한 불신이 지펴진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사만 구천 원 주고 산 하얀 카펫을 구하러 갈 수 있었다. 카펫은 이미 끝이 물들어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하는 수 없이 카펫을 고이 접어 한쪽에 치워두었다. 네가 물에 젖은 걸레를 던져주며 닦으라고 하길래 야, 하고 반발하며 일어섰으나 뭔지 모를 기세에 눌려 조용히 다시 앉았다. 너는 돈이 많았다. 집도 당연히 잘 살았다. 너의 아우라는 바로 그 권력과 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네가 해코지할까 봐 무서웠다. 가슴 펴고 당당히 살고 싶었지만, 나는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너를 뒤에서 몰래 욕하던 전 직장 동료가 뺑소니로 죽었다는 소문.


 그것도 악의적인 소문에 불과할까?

     

 걸레를 빨고 다시 닦는 과정을 네 번 반복한 뒤에야 마룻바닥은 깨끗해졌다. 징하다. 징해. 분명히 그 소문은 가짜가 아닐 것이다. 저 성질머리로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그렇게 못된 너를 미워할지언정 싫어하지는 못하는 나 자신이다. 나도 뭔가에 단단히 씐 게 분명했다. 벽에 기대 내가 한심스럽게 바닥을 걸레질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너는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너를 찾으러 더러워진 걸레를 개수대에 던지고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너는 아파트 난간에 팔을 걸치고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는 그쳤다. 저걸 뒤에서 밀어?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너에게 다가갔다. 붉은 노을빛으로 물든 얼굴을 천천히 내 쪽으로 돌리며 너는 말했다. 방금 밀까 생각했지. 나는 뜨끔했다. 아니라고 부정했다. 생각만 했지, 진짜 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너의 옆으로 다가갔다.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장마에 더위는 한풀 꺾였고 선선하기까지 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너 정말 부모한테 죽임당할 뻔했어? 아니.

  

 너 정말 전 직장 동료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어? 아니.


 넌 돈이 많은데 안 행복해? 안 행복해.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붉기만 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뭔가 다 야속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님도, 나의 가난도, 너의 부유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은지 알 수 없는 이 상황도. 나는 우물쭈물하다 입을 뗐다. 미안해. 연락 앞으로 잘할게. 너는 웃었다. 나는 네가 웃는 걸 처음 본 것 같았다. 너는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무슨 소리를 뱉는지도 모르고 그저 그 눈빛에 홀린 듯 분방하게 입술을 놀렸다. 그러니까 죽여버린다고 하지 마. 네가 진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연락 못 했어. 너는 두 손으로 난간을 짚고 잠시 13층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너를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 그건 돈 때문도 권력 때문도 아니다. 그건 일종의 우리 사이의 한심한 놀이. 나는 아무래도 진지하게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잊어버린 몇 달 전의 일기 중


 다들, 조금씩은, 엽기적인 사랑을 하는 듯하다. 우리 부모님의 사랑도 어딘가 엽기적이었고, 완전한 희생정신과 아름다운 빛으로 무장한 사랑도 내가 모르는 엽기적인 면을 숨기고 있을 것만 같고, 너와 나의 사이야 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이, 무엇이 엽기적인 느낌을 주는가. 서로의 엽기적인 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작고 예쁜 정신병이 원인일까. 모르겠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 마음을 따르다 보면 이상한 일이 많이 생겼다. 마지막 한 꺼풀의 가식까지도 벗고, 완전히 날 것의 새빨간 엽기적인 영혼의 실체로 너를 터뜨릴 듯이 끌어안으리라. 그러면 안 되나? 불가능한 일이라면 그냥 농담이었다 하리라. 진지함을 가볍게 위장시키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굳이 피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무슨 말을 하든 끝을 내다보고 있다는 듯, 너와 나의 사이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는 아무도 태우지 않은 자전거와 같은 운명이란 걸 알고 있다는 듯. 너는 그럼 가끔 서러운 듯한 얼굴이 됐다. 물론 그 얼굴을 보진 못했다. 나는 야맹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밤의 어둠 속. 나는 너를 대신해 코피를 흘렸다.


 야맹증이 없는 너는 나를 돌아보더니 휴지를 뭉텅이로 뽑아 나의 코를 틀어막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왜 자꾸 개 같게. 나는 눈웃음을 지었다. 너는 왜 자꾸 내가 너를 대신해 코피를 흘리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화가 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나도 이유를 몰랐다. 어쨌든 내가 코피를 흘리면 네가 코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나는 너를 만나기 전까진 코피를 흘려본 적이 없었다. 서툴기 그지없는 모양새로 흐르는 피를 틀어막고 있는 너의 손을 천천히 붙잡고 내렸다. 숨 막혀. 내가 말했다. 나의 저주받은 야맹증 때문에 네가 나를 무슨 얼굴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팔이 하나 목에 둘러지더니 쇄골 위로 파묻히는 숨결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너는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으니까. 나를 바싹 더 바싹 끌어안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결국 내 품에 파고드는 모양이 되어버린 네가 왠지 안쓰러웠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의 등을 천천히 다독여주었다. 모르겠다. 그냥 네가 마음 둘 곳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품 안에 들어차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한참을 다독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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