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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17. 2024

어떤 자비

토막 소설


  찬아, 선생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햇빛이 내리는 텃밭을 바라보다가, 나를 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병마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정말이지 기적적으로 승기를 잡은 선생님은 그러나 아직 병색이 엷게 퍼진 얼굴이었다. 선생님은 손짓으로 나를 불렀고, 나는 툇마루에서 일어나 선생님에게 갔다. 선생님의 아내분은 외출 중이셨고 낡고 고적한 초가집에는 선생님과 나뿐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선생님은 검지 끝으로 선반 위의 반짇고리를 가리키며 저기에 있는 담배를 좀 가져다달라고 부탁하였다.


  병균 군단이 마지막 발악 중인가보다. 오늘은 영 기운이 없다 찬아.


  선생님 나를 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것은 마지막 발악에 지나지 않았고, 선생님도 이 싸움의 승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예를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히 떠날 패잔병들을 향해. 나는 군말 없이 일어나 반짇고리 속에 선생님이 숨겨둔 담뱃갑을 꺼내 선생님에게 드렸다. 고마워.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그제야 선생님의 아내분의 얼굴이 떠올라, 피우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하고 말리는 투로 물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미 희고 얄따란 담배개비를 입에 물고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태연하게 불을 붙였다. 나는 멍하니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여유로운 얼굴로 아내분도 선생님이 몰래 담배를 피우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왜 굳이 담배를 반짇고리 안에 숨겼냐고 묻자, 선생님은 그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냥 웃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내게 담배를 권유하였지만 나는 괜찮다고 거절했다. 그건 부인분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햇빛이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며 말없이 오래 담배를 태우셨다. 나는 반짇고리에 담배를 넣고 원래 반짇고리가 놓여 있던 상태의 미묘한 삐뚜름마저 그대로 돌려놓았다. 막상 살아나니 별거 없네. 선생님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왠지 나라는 청자를 의식한 혼잣말 같았다. 나는 선생님이 정말 자신의 회생을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시니컬한 화법의 습관인지 헷갈려서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들었을 때, 나는 선생님의 옆얼굴에서 은은한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아아. 선생님은 지금 누구보다 기쁘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내년 봄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잖아요. 하고 말했다. 선생님은 내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 잠겼다. 선생님이 피우시는 담배 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선생님의 옆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으나 그 은은한 빛은 한사코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선생님은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였다. 텃밭의 오이가 먹고 싶다고.


  예? 나는 되물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텃밭의 오이를 따는 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오이를, 아주 싱싱하고 시원한 오이를 한 입 가득 씹어먹고 싶다고 말했다. 담배를 태웠더니 입안이 텁텁하다고. 나는 댓돌에 가지런히 벗어둔 신발을 신고 마당의 채소밭 가까이 가보았다. 선생님의 무심한 방치 속에서 상추도 오이도 우직하게 자라고 있었다. 전부 푸릇푸릇한 빛깔이었다. 기특한 녀석들이지.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꽃처럼 벌어진 상추잎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개미가 기어가고 있어요. 내가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진귀한 일이라고 대꾸했다. 그 말투가 뭔가 나를 놀리시는 듯하여 갑자기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개미가 상추잎의 야들한 주름살을 실끝 같은 발바닥으로 어루만지면서 기어가는 일은 조금도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작은 생명의 하찮은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까. 나는 가장 건강하고 싱싱해 보이는 오이를 땄다. 오이를 따는 것이 오이에게 미안하진 않았다. 대신 고마움의 표현으로 늙은 잎을 몇 개 따주었다. 오이 넝쿨이 의지하고 있는 지지대는 튼튼해 보였다.


  나는 마당 한켠에 있는 호스에 연결된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고 오이를 씻었다. 오이의 오돌토돌한 껍질이 손바닥에 비벼지는 느낌이 시원했다. 내 마음의 묵은 때가 벗겨지는 것 같았다. 이 오이는 분명 선생님의 텁텁한 입안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깨끗이 씻은 오이를 가지고 선생님에게 갔다. 댓돌에 다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선생님은 쌈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왜 선생님은 그걸 지금 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쌈장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고 다시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가 장독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그늘진 방안에 서늘하게 앉아서 알 수 없는 글을 낭독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이미 지나간 유월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은 팔월이었다. 내가 지나온 유월에서 유월의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은 목소리.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쌈장을 푹 떠서 그릇에 덜었다. 괜히 식욕이 돋아서 새끼손가락으로 그릇에 던 쌈장을 푹 찍어 먹어보았다. 짭조름한 맛에 눈이 번쩍 떠졌다.


  내가 돌아오자, 선생님은 읽던 책을 뒤집어 내려놓으시고 더운데 수고했다며 앉을자리를 내어주셨다. 나는 앉았다. 아내가 곧 올 거다.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내가 따온 마당의 오이를 반으로 뚝 나누었다. 그리고 내게 반절을 건네며 같이 먹자고 말씀하였다. 나는 얼떨결에 반토막 난 오이를 받아들고 잠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가져오라던 쌈장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오이를 아그작 씹어먹었다. 선생님은 상당히 흡족해 보이는 얼굴로 내게도 먹어보라고 했다. 죽음이 가까웠다고 느꼈을 때, 선생님은 텃밭에 방치한 채소를 바라보며 견디었다고 말했다. 일부러 더 방치하고, 때론 어서 뒈져버리라며 텃밭을 향해 마당에 침을 뱉었지만 참 독하게 살아남은 놈들이라고. 아내가 나보다도 채소를 더 살리려 들었지. 선생님의 농담에 나는 웃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생오이를 아그작 씹어먹었다. 오이의 수분이 삶의 텁텁함을 잠시 씻어주었다. 코끝에 오이의 향기가 풍겨왔다. 담배 냄새보다 향기롭진 않아도 싱싱하고 푸릇푸릇한 향기였다. 나는 자꾸만 입안을, 나의 삶을 오이의 수분으로 씻고 싶어 생오이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었다. 선생님은 내게 하나 더 먹을까. 하고 물었고, 나는 입안 가득 오이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마당은 오후의 햇빛이 보다 온화하게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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