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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20. 2024

메타포의 패배


나는 사람이 싫어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는 아주 깊은 숲속에 있어 사람은 나를 찾지 못합니다. 나를 찾으려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옆엔 보라꽃 피우는 벙어리 나무가 그 옆엔 사시사철 푸른 잣나무가 기품 있게 서 있지마는 그들은 나의 친구가 아닙니다. 가끔 더 깊은 숲속 어딘가에서 달빛 어머니의 자장가 여음처럼 울리어 오는 계곡물 소리가 귀를 간질입니다. 죽음의 영원한 아늑을 생각하게 되는 목소리이지만 나를 죽일 생각도 키울 생각도 공평하게 없는 나는 서늘한 잠을 사랑할 뿐입니다. 수십 개 가지에서 스스로 꾸물꾸물 영근 과일의 무게를 간신히 즐거이 견디어내는 것이 나비 같은 행복이라고 여기던 내게 웬 포악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높고 날카로운 포효가 한낮 아시잠의 달팽이관을 후벼파 미열 같은 두통과 함께 나는 슬며시 눈을 떴습니다.


한 사내가 철근 같은 무릎을 꿇고 정돈된 슬픈 호흡으로 대지를 뒤흔들면서 점점 완전한 절망의 상을 갖추어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곳에서 사는 동안 나는 무수한 인간들의 음삼하고 매혹적인 광경을 보아 왔지만 그 사람처럼 그윽한 절망을 포효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경배하듯 머리를 조아리는 대상의 얼굴은 사선으로 내리는 빛에 가리어 볼 수 없었으나 어디선가 섬세히 다가온 한 줄기 바람이 저이는 곧 죽는대 말리는 이는 몇 년 간 그를 따랐는데 그가 모든 걸 내던지려 하니 미칠 것 같아서 저러는 거래 내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기어이 재난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애념과 증오를 증명하려 할 제자의 끔찍한 미래를 묵묵히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긴 옷 입은 신성(神聖)은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뿐이었습니다. 어딘지 동정을 느꼈습니다. 햇귀 같은 신성의 옷자락 휘날리며, 곧 죽임당할 이가 자리를 떠나자 그때까지 철근 같은 무릎으로 대지의 숨통을 압박하고 있던 그 사람은 비틀비틀 고개를 들어 하늘로 제 모든 표정을 풀어 날렸습니다. 공허보다 검은 감정은 종이나비 같은 날갯짓으로 날아가다 바람에 휩쓸려 나의 울울한 머리칼에 걸리었고 나는 몹시 답답해졌습니다. 나는 인간이 싫어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는 인간이 싫어 나무가 되었는데


점점 젖어가는 인간의 얼굴을 마주한 영원의 찰나 속에서 나는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수십 개 가지에서 불그스름히 영근 그 모든 메타포의 열매를 나는 한꺼번에 잃어버렸습니다. 갑자기 거대한 나무에서 수백 개의 붉은 것이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광경은 종말 같아서 아름다웠고 사내는 넋이 빠진 건지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표정이고 눈빛이었습니다. 이보다 첫만남이 폭력적일 수는 없겠는 걸 확연히 가벼워진 체중을 오묘한 기분으로 받아들이며 내가 생각하였을 때 사내의 얼굴을 햇빛이 비추었습니다. 반짝거렸습니다.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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