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가, 학대인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가 쓴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읽고

by 뚱이

모피를 입은 비너스 - 사랑인가, 학대인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가 쓴 "모피를 입은 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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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고 알려져 있고, 그의 이름에서 ‘마조히즘’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고 한다.

읽기 전에는 약간의 호기심과 함께 ‘19세기 금기를 깬 문제작’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막상 읽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 남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지만 지금은?

보수적인 유럽 사회에서 여성 지배와 남성 복종의 성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다룬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파격이었을 것이다. 실제 자신의 경험담이라고 했다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겠지만 요즘은 다양한 성적 취향이 인정받는 시대이다. 성인용품 샵도 흔하고, 다양한 도구를 인터넷으로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편의점 매대에 놓인 성인용품 디자인만 해도 꽤 다양하지 않은가.

19가 붙은 웹소설이나 웹툰도 엄청스레 많은 요즘이라서인지 이 소설의 설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폭력과 자극은 노출될수록 무뎌지니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불편했던 건 이게 과연 ‘롤플레이’나 ‘합의된 관계’로만 볼 수 있을까 하는 거다. 소설 속에서 제베린과 반다는 노예 계약을 맺는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구애하는 제베린에 대한 반다의 지적은 꽤 잘 들어맞지만

"당신은 정말이지 여자를 철저하게 타락시킬 남자군요!" -p.61

하지만 '이내 정숙한 여자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악마가 돼라'는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폭력을 행사하는 반다와

기껍게 고통을 느끼며 도취감에 사로 잡히는 제베린.

관계가 진행될수록 반다는 억압과 폭력에 익숙해지고 마침내 남의 손을 빌려 가장 큰 상처를 입히고 떠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다가 주는 고통을 갈구하고 희열을 느끼던 제베린은 마침내 그 상황 속에서 낭만을 몰아내게 된다.

'남에게 채찍질을 당하겠다고 나선 자는 맞아도 싸다'는 교훈을 얻은 제베린.

소설 속 내용을 당시의 고고한 관념이 지금의 잣대로 살펴보자.

요즘 말로 하면 가스라이팅 아닌가. 때리면서, 맞으면서! 그것을 사랑이나 헌신으로 합리화하게끔 만드는 것, 권력의 불균형이 점점 심화되고 폭력의 강도가 높아지는데 그걸 ‘특별한 사랑’이라고 포장하는 것.

현대의 BDSM 문화는 합의, 안전, 상식을 강조하는 상호 합의 문화라고 하는데, 소설 속 반다와 제베린의 관계는 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15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은 단순히 특정 성적 취향을 다룬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학대와 지배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텍스트로도 읽힌다. 작가가 금기를 깬 용기는 인정하지만 이 관계가 낭만적이라거나, 사랑의 한 유형이지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오히려 ‘합의’와 ‘자발성’이 무엇인지, 사랑과 집착과 학대의 경계가 어디인지, 더 신중하게 질문해 봐야겠다.

고전을 읽을 때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긴 노래를 감상하는 듯한 인물들의 대사가 때로 참 아름답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작품을 읽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게 고전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고^^

TMI

참 이상한 게 대체 난 왜 고전 속에 나오는 온갖 묘사와 서술보다 반지의 제왕에 나왔던 나무 정령 엔트들의 노래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까.




출판사의 서평단에 참여하여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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