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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콩 Nov 02. 2022

5.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동생과 이별하기


2019년 8월 31일.
예감하고 있었음에도 감당할 수 없는 날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나랑 내 쌍둥이는 새벽 즈음 잠들어서 오후까지 자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토토가 이상하다며 우리를 깨웠다. 일어나서 본 토토는 자다 일어나서 비틀거리면서 계속 쓰러졌다. 몸을 가눌 수 있게 잡아주자 밥을 먹었고, 그 밥은 토토가 마지막으로 먹은 밥이 되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시간, 오후 2시 24분. 토토는 기운이 없는 듯이 계속 주저앉았고, 배변판 위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급하게 병원에 전화를 걸어 3시에 병원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토토를 봐주신 주치의 선생님에게 안겨 들어갈 때도 그날이 토토와 이별하는 날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검진을 하고 나온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종양에 있던 혈관이 터지면서 몸 안에 있는 혈액이랑 혈관에 있는 혈액이 똑같은 양으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사실 지금도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수혈과 수술, 수액 처방을 해 줄 수 있지만 생명을 연장해 줄 수는 없다는 말과 함께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말에 우리 자매는 병원임을 알면서도 눈물이 터졌다.

17년을 같이 산 하나뿐인 동생이 오늘이 지나면 못 본다는데 안 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마지막 가는 길이 아프고 힘들 수 있다는 말... 안락사라는 방법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실감이 났다.


선생님의 입장에선 최선의 말이었겠지만, 그 당시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토토가 두 달이라는 시간을 줬음에도 말이다. 우리는 진료실에서 토토를 안고 나와서 다른 사람이 많은 병원 안에서 펑펑 울었다. 보다 못한 아빠가 빨리 가자며 재촉했을 정도였다.

우린 안락사 대신 집에 가서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당시에는 토토가 싫어했던 병원보단 17년 살았던 집이 낫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오후 4시. 집에 도착한 우리는 토토가 좋아하는 이불을 깔아주고 토토를 눕혀놨다. 병원에 같이 가지 않았던 엄마도 사실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우리 세 모녀가 울고 있으니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컴퓨터를 하셨다.
그때는 서운했다. 아무리 강아지라고 해도 하나뿐인 아들인데, 제일 많이 꼭 붙어서 잔 토토인데 컴퓨터를 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빠 나름의 슬픔을 달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엄마에게 나중에서야 듣게 됐는데, 아빠도 눈물이 날 만큼 슬펐지만 세 모녀가 엉엉 울고 있으니 본인도 그럴 수는 없어서 참으셨다고.

많이 아픈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도 내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엄마와 누나들이 계속 우는 게 이상한지 계속 뒤척이고 일어나려고 애쓰던 토토.

우리는 마지막까지 힘을 내려는 토토에게 괜찮으니 편하게 가라고 다독였다. 할 수 있는 말은 버티지 말고 이제 편해지라는 것뿐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나와 자매는 너무 고통스러운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야 하나 엄청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토토가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는 만큼 우리도 고민을 접고. 토토를 안고 우리 자매가 쓰는 방으로 갔다. 셋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고, 토토의 흔적이 잔뜩 남은 곳이었다. 그런데 토토는 그마저도 힘든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다시 눕힌 우리는 토토만 보면서 지금껏 하지 못했던,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사실 토토는 우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을 거다.


눕히자 토토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찾으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코를 씰룩거렸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하고 싶어 우리 세 모녀는 토토 옆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헤어짐의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토토는 점점 숨이 거칠어지고 입이 벌어지더니 혀가 말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혀를 잡아준 큰 누나. 우리는 마지막 이야기가 전해지길 바라며 토토에게 가도 된다고, 이제 편히 쉬어도 된다고, 우리 아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내가 지금까지 후회하는 건 그때, 사랑한다고 하지 못 한 거다. 츤츤거리는 성격이라 마지막 인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한단 말을 못한 못난 누나. 그래도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토토에게 이제 그만 편히 쉬라고 했다. 사랑한다고 해주지 못한 건 평생을 살아가며 후회할 것 같다.

오후 9시 18분.


가족을 위해 힘겹게 버티고 버티던 토토는 가족 품을 벗어나 무지개다리로 떠났다. 토토의 마지막 숨이 꺼져갈 때, 안 된다고 아직 안 된다고 오열하던 엄마. 난 그렇게 오열하는 엄마를 처음 봤다. 아빠는 마지막을 지켜보시고 바로 자리를 뜨셨다. 간 곳은 화장실. 아마 그 안에서 많은 생각에 휩싸인 채 담배를 태우셨겠지. 난 우느라 아무것도 못 했고, 책임감 있는 쌍둥이는 울음을 참아가면서 펫 장례식장에 연락을 돌리고 예약 잡느라 바빴다. 회피형인 나에게 가족의 죽음이란 같이 함께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피할 만큼 힘들었다. 쌍둥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거다. 배려심이 없는 나와 책임감 있는 쌍둥이. 모든 걸 떠안아야 했던 쌍둥이에게 미안한 감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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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3~2019.08.31
태어난 지 6177일
처음 쓰러진 지 6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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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물감을 뒤엎은 듯이 아주 작은 까만 꼬물이로 우리 집에 왔던 토토는 듬성듬성해진 금빛털과 함께 떠났다.
친구들이 많을 무지개다리로.

이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건, 그날의 일을 적어뒀다. 기억은 언젠가 퇴색되기 마련이고 잊은 기억이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다.


멋모르고 데리고 왔던 막냇동생 토토. 시간이 흐른 만큼 우리 집에 온 첫날의 기억이 또렷하지 않으니 마지막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기억할 수 있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시간까지 확인하고 적어놓을 정도로 난 메모에 집착했다. 슬픔을 조금 덜어보자 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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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야, 안녕.
내 동생 토토, 안녕.
우리 나중에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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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금서처럼 절대 열어보지 않던 메모를 다시 켜서 처음부터 읽었으니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이별은 수없이 많을 거고, 힘든 누군가가 내 글을 본다면 나 또한 이별을 겪은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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