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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Oct 12. 2015

제주 여행, 한 손에 '여행의 기술'을 들고

프롤로그

가을. 10월이 오기 한 달 전의 금요일. 저녁 6시. 강남대로 양 옆으로 우뚝 솟은 빌딩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바람이 빌딩들 사이의 좁은 틈을 파고든다. 이내 곧 언덕길을 차고 도움닫기를 하더니 축 늘어진 가지를 타고 올라간다. 경쾌한 청량감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정해진 동선이 있는 듯 거침없는 속보로 대중교통 거점으로 향한다. 오고 가는 사람들 간에 충돌이 한번 정도는 날만도 한데 신기하게 그렇지 않다. 심지어 스마트폰에 뺏긴 시야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지만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하면 그뿐이다. 묘기에 가깝다. 간혹 그 순간에 신경질적 반응으로 눈 한번  흘깃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평소처럼 걷고 싶지만, 나의 뒷 행렬의 맹렬한 속도 때문에 걸음이 빨라진다. 몰이를 당하는 것 같다. 도로 사정도 인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도로의 신호등은 제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분침이 6시를 살짝 비켜 지나갔을 뿐인데, 도로가 좁아지고 빽빽해졌다. 도대체 이 차들은 다 어디에서 출몰한 건지. 게다가 이 좁은 차선 간격으로 운전은 왜 그리 잘하는지. 그리고 사람이나 차나 왜 그리 급하게 가는지. 하긴 서두르게 될  수밖에 없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회사에 얽매혔던 제한적 삶의 자아라면 자유를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 당연하다.


지하철 출입구가 보인다. 출입구 앞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로 양 손에 토시를 낀 아줌마가 꽤나 분주하게 움직인다. 왼쪽 어깨를 가로질러 오른쪽 허리춤으로 내려오는 검은색 가죽 가방 안에는 "특별 할인"의 문자가 돋보이는 전단치 뭉치가 껴있다. 때 마침 도로 갓길에 통근버스 몇 대가 차례로 정차한다. 이내 지쳐 보이는 퇴근자 무리들이 지하철 입구로 몰린다. 전단지 아줌마는 그 기세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꿋꿋한 손놀림과 몸동작으로 전단지를 거침없이 건넨다. 퇴근자들은 길을 막아서며 건네는 아줌마의 전단지를 속수무책으로 받아 들  수밖에 없다. 나도 받아 들고는 전단지를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꾸깃 집어 넣은 채 계단을 내려가 지하철 플랫폼으로 향한다.

『이 팸플릿을 만든 사람들은 어두운 직관을 통해, 야자나무, 맑은 하늘, 하얀 해변을 보여주는 노출 과다의 사진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닌 이런 사진들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라면 회의와 신중을 자랑할 만한 사람들도 이런 요소들과 마주치면 원시적인 순수와 낙관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중에서 -


평소에 넓어 보였던 플랫폼은 사람들이 가득해 좁아 보인다. 가뜩이나 좁은 상황에서 천장에 매달린 지하철 전광판에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계속 밀려드는 사람들로 이제는 앞사람을 밀치고 어깨싸움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지나갈 수 없다. 게다가 플랫폼은 이미 사람들의 열기로  후덥지근하다. 본디 좋지 않은 지하철 공기에 더운 열기까지 더해지니  언짢아진다. 삐링삐링삐링 하는 소리와 함께 전철 한 대가 플랫폼에 접근한다. 이미 전철 안은 만원이다. 전철이 정해진 선에 정차하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짜증스러운 신음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당장 빨리 집에 가려면 나도 저들과 함께 앞에서 밀고 뒤에서 밀리면서 전철 안에 몸을 끼워 넣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플랫폼에서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사람들이 빠지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다음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주머니에 전단지를 빼서 읽어본다. 여행사 프로모션 특별 할인 전단지. 9월 말 추석 연휴 특수를 노리는 여행사의 전단지에는 미쳐 가지 못한 여름 휴가를 채워줄 만한 절호의 기회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잡으라는 문구와 동남아 휴양지 사진들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전단지를 보고 제주도를 떠올렸다. 지난 5월에 다녀온 제주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아무렇지도 않게 와이프에게 제주도에 다시 가겠노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것도 혼자서.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의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중에서 -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듣기 힘든 이유는 간단하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행의 시작과 끝은 논리의 사고가 아니라 감정의 사고를 통해 이뤄진다. 설득과 객관의 논리가 아니다. 순전히 저마다가 갖고 있는 고유한 삶과 삶을 이루는 감정의 이야기이다. 즉, 여행을 떠나는데 있어 이유 따위는 없다. 그저 가고 싶으니까 가는 것이다. 주변의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여행을 왜 가냐고 물어도 당황하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가고 싶으니까 간다고.  


『고대 철학자들의 준엄하면서도 비꼬는 식의 지혜가 떠오른다. 그들은 번영과 세련으로부터 물러나 통이나 진흙 오두막 속에 살면서,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나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중에서 -


타인보다 민감한 내게 있어 여행은 평소에 꺼낼 수 없었던, 담아둘  수밖에 없었던, 회피하거나 두려워했던, 생각하기 싫었던 이야기를 용기 있게 꺼내어 진지하게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드 보통이 말했듯이 모호한 방식이지만 삶에 쌓아둔 쟁점들을 마주하기에 여행만큼 좋은 것은 없다. 차고 넘치는 물질적 향유를 바탕으로 가는 여행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오로지 나의 심리적인 위안을 위해 가는 여행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를 들고 떠난다. 눈으로 읽었지만 이번에는 몸과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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