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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Nov 23. 2015

제주 여행, 한 손에 '여행의 기술'을 들고

첫 번째 이야기


10월의 금요일 늦은 밤 9시 47분. 정자역에서 탄천을 따라 섬섬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가을의 높은 밤하늘에 넓게 깔린 암회색 구름들 사이로 밝은 노란 달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무심한 듯 흘러가는 탄천의 물소리를 왼쪽 귀에 걸쳐 들으면서 커다란 다리 지붕 밑을 지났다. 다리 밑을 빠져나오니 익숙한 듯, 생경한 듯한 풍경이 내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달은 밤이라는 무겁고 두꺼운 책에 반쯤 끼어진 듯한 책갈피가 되어 은은한 초가을 빛을 내고 있었다. 십여 분이 지났을 뿐인데 갑자기 투명한 물빛 점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흥건히 채우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잠시 당황한 듯 주춤하다가 이내 결정한 듯 각자의 방향을 틀어 뛰기 시작했다. 내가 굴다리 밑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가자마자 세상이 두꺼운 물막 아래로 잠기기 시작했다. 문득, 쇠잔한 기억들이 무의식 바닥 저 끝에서 스물스물 올라왔다. 삶의 간섭들 때문에 의식 반대편에서 망각했던 기억들과 감정들이 뜻밖에 마주친 단서 하나에 물고기 만난 듯 기승을 부렸다. 제주의 밤, 제주의 달, 제주의 비, 제주의 바람, 제주에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제주에서 보듬어진 감정들. 쏟아지는 영문 모를 비를 보면서 생각했다.


'제주를 다시 가야겠어.'


『이제 공원은 낯설어졌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풀밭은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도시의 가로등에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낮은 하늘 아래로 비에 젖은 검붉은 벽돌과 마주치자, 잠복했던 슬픔이, 행복을 받거나 이해를 얻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회의가 물고기 만난 듯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중에서-




머리로는 제주도 다시 가는 것이 뭐 그리 어렵고 대수일까 생각했지만, 사실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추석 뒤로 휴가를 이틀 붙여야겠다는 나의 야심 찬 계획 아래 일찌감치 예약한 항공편과 숙박은 열등감 콤플렉스 팀장 덕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팀장을 보고 있자면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스탠리 밀그램이 실험한 복종 때문에 마지못해 그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 악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복종과 권력이 동시에 주어질 때 어떻게 악용하는지 알 뿐이다. 결국 제주를 가기 전전날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덕분에 여행의 설렘과 흥분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연일 야근에 몸은 피로하고 떠나는 당일 새벽에 잠까지 설쳤지만 충만한 아드레날린 덕분에 피곤한 지 몰랐었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내 나는 발 뒤꿈치를 연신 땅에 툭툭 치기 바빴다.



평일 오전 7시가 조금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포공항에는 꽤나 사람들이 많았다. 항공권을 발권하고 일찌감치 탑승수속대를 통과해 8번 게이트 대기석에 앉았다.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니 육중하면서 유연한 동체를 뽐내는 비행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겹겹이 쌓인듯한 희뿌연 한 안개가 활주로 바닥에 낮게 깔려있었다. 그 속을 굉음과 함께 하늘로 박차고 솟아오르는 비행기가 보였다. 비행기를 보니 여행이 실감이 나면서 긴장이 약간 풀렸다. 긴장이 풀리니 피곤과 설친 잠의 여파가 사정없이 몸으로 밀려들어왔다. 연신 하품을 해댔다. 잠을 쫓아낼 요량으로 화장실에서 세수를 연거 푸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슬렁거리는 식으로 공항 구경을 대충 마시고 비행기로 향하는 셔틀버스에 탔다. 간드러진 애교에 비음을 얹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셔틀버스에서 끓이지 않았고, 여자 앞에 남자는 사랑의 쟁취를 위해 놓쳐서는 안될 호응을 계속했다. 살짝 웃음이 났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아무리 물질적 충만이 가득한 여행이라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반도 즐길 수 없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싶었다.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 전에 우선 좀 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 요구들 가운데는 이해에 대한 요구, 사랑, 표현, 존경에 대한 요구가 있다.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나무 오두막을 즐기려 하지 않는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중에서-



창가 쪽 좌석에 앉았다. 조금 있으면 하늘로 솟구치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을 생각을 하니 창 밖의 순간들을 놓치기 싫어졌다. 기차 창 밖의 풍경과 비행기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앞으로만 달려가는 기차에서 보는 풍경은 속도에 원근감을 얹은 2차원적 느낌이라면, 비행기는 거기에 입체를 더한다. 활주로를 맹수처럼 미친 듯이 질주하다가 엔진의 순간적 폭발력으로 비행기 동체가 하늘을 향할 때부터 세상은 3차원 풍경이 된다. 공항버스를 타고 온 그 길을 저 높은 하늘 아래에서 내려다 보는 꼴인 셈이다. 운 좋게 엔진을 뒷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뒷좌석에서 연신 발로 내 등받이를 걷어차는 남자아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창 밖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활주로 출발점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기계 안에서 창 밖으로 보면 낯익은 크기의 풍경이 길게 보인다. ……(중략)…… 우리는 완만하게 대기 속으로 솟아오르며, 눈이 아무런 방해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거대한 시야가 열린다. 지상에서라면 한나절이 걸릴 여행을 눈을 아주 조금만 움직이는 것으로 끝내버릴 수 있다. ……(중략)…… 이런 이륙에는 심리적인 쾌감도 있다.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화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를 상상하며,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한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중에서 -



제주공항 밖으로 나오니 서울의 10월 날씨가 아니었다. 서울의 초가을과 달리 제주는 여름의 느린 행진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햇빛의 각이 가파른 만큼 빛의 복사열도 진지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야상을 벗어 배낭 속에 잘 접어 넣었다. 때마침 제주의 바람이 익어가는 얼굴을 경쾌한 세기로 식혀주었다. 배낭을 메고 정류소에서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100번 버스를 기다렸다. 지난 5월에는 갈치조림이었다면 이번에는 해장국이었다. 제주에 가면 반드시 찾아가서 먹어야 한다는 회사 동료의 성화(?)에 가보는 참이었다. 은희네 해장국 근처 정류소에 내리고 신호등을 건너 안쪽 골목을 들어서니 왼편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을 보면 해장국 먹으려면 줄을 서야 하나 싶었지만 운 좋게도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리 잡자마자 알아서 해장국이 나왔다. 일단 배가 너무 고팠기에 시장이 반찬이라고 허겁지겁 먹었지만, 싱겁게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양념은 너무 강했다. 맵고, 짜고, 쓰고. 게다가 맛을 음미할 수도 없었다. 이미 가게 밖은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줄을 서고 있어서 빨리 후다닥 먹고 나와줘야 했다.


배도 든든히 채우니 힘이 났다. 이제 본격적인 제주 여행이 시작인 셈이었다. 김녕 어민복지회관(제주 올레 20코스 시작점)으로 가려고 701번 버스를 탔다. 제주시외버스를 타면 버스 승객이 제주도민인지 관광객인지 손쉽게 알 수 있다. 무심코 후불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찍는 사람은 여지없이 관광객이다. 제주는 행선지에 따라 요금이 다르기 때문에 제주시외버스를 탈 때는 행선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 그래야 기사님이 단말기에 요금을 정해준다. 그것을 모른 채 넙죽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찍으면, 기사님의 속 터지는 구박이 날아온다. 거기에 그 모습을 답답하게 바라보는 제주 할망 어르신들의 역정 같은 거들기도  한몫한다. 하긴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오죽 많고 많아지고 있으니, 이런 광경이 버스기사님이나 할망 어르신들에게는 답답하실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관광객은 몰랐을 뿐인데 하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 같았다.


 한적한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는 버스 바깥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행 광역버스 손잡이에 온 몸을 맡긴 채 움직임을 봉쇄당하는 꼴이 아니어서 너무 좋았다. 낮은 지붕 가옥들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느긋하게 바라봤다. 앞자리에 앉은 중국인 여자 관광객들은 신이 나서 손을 가리키며 제주 바다를 반겼다. 뒷자리에서는 자기 머리 위로 올라온 길쭉하고 무거운 배낭을 멘 파란 눈의 남자와 금갈색의 여자가 바다를 바라보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 자리에 교복을 입은 남고생이 무심함을 가장한 관심 가득한 눈으로 슬쩍 쳐다봤다. 나는 이들이 함석 해변을 보러 가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701번 버스가 함덕 해수욕장 근처 정류소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들뜬 얼굴을 하면서 내렸다. 그 모습을 보니 저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도시 한 가운데에서 느낀 헛헛함을 채우려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서는 삶을 고양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에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수심에 감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 무디게 할 수 있다.』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중에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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