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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Dec 14. 2015

제주 여행, 한 손에 '여행의 기술'을 들고

두 번째 이야기

김녕 앞바다가 보이는 길 옆 나무에 매달린 올레 리본이 나를 김녕 서포구로 안내한다.

701번 버스는 함석 서우봉 해변을 지나 30분을 더 달려 남흘동 정류소에 도착한다. 정류소에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다. 정류소  맞은편에 종류를 알 수 없는 제주의 나무들이 성벽처럼 백련사를 에워싸고 있다. 이런 식이면 조계종 관음사의 말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이 없을 것 같다. 김녕 앞바다가 보이는 길 옆 나무에 매달린 올레 리본이 나를 김녕 서포구로 안내한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시선을 바다에 잡아둔 채 김녕 서포구를 따라 올레 20코스 시작점인 김녕 바닷가 마을 초입까지 걷는다. 김녕 포구에서 해안선을 따라 김녕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김녕리 어촌은 제법 크다. 마을은 종횡을 마다하지 않고 육지로 퍼져 1132번 일주동로 코 앞까지 닿는다. 나는 마을에서 해안선과 가장 가까운 골목길을 걸으면서 뭉클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히죽히죽거린다. 나는 그저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나조차 미쳐 알지 못했던 감정의 때가 씻겨져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김녕 어촌 초입 전의 김녕 서포구

진지한 비평가들은 자연을 자주 여행하는 것이 도시의 악을 씻어내는데 필수적인 해독제라는 워즈워스의 주장에 거의 만장일치로 동조하고 있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189 쪽 -  


도시에 살면서도 도시가 습관적으로 길러내는 그 저열한 감정들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 자연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195 쪽 -




맨바닥에 묵직한 현무암을 아랫돌로 깔고 그 위로 크고 작은 현무암을 층 구분 없이 굄돌로 겹겹이 쌓아 올린 제주의 담벼락에서 나는 묘한 조화의 안정감을 느낀다. 도시의 담벼락과는 다른 감정이다. 벽돌과 시멘트로 반듯하게 층층이 쌓아 올린 도시의 담벼락에서는 규칙적인 패턴과 대칭에서 오는 질서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도시 담벼락에 익숙한 사람들이 제주의 담벼락을 보면 허술하다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도시 사람은 모른다. 제주의 담벼락에는 틈새와 죔돌이 있다는 것을. 제주 담벼락에는 틈새가 있어 제주의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막지 않고 오히려 내맡긴다. 행여나 담벼락이 무너질 걱정은 말자. 죔돌이 그 틈새의 여백을 간직한 채 쐐기돌  못지않은 역할을 한다. 이런 담벼락 사이를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골목길을 걷는 것이 즐겁다.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고, 코가 즐겁다. 그러나 가끔씩 그 틈새에 시멘트를 덧칠하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담장의 발견하면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206 쪽 -



김녕 해수욕장

김녕 해수욕장. 제법 큰 파도가 하얀 거품 띠를 앞장 세우고 백사장을 밀어 올리려는 듯 크게 일렁이며 다가온다. 곧, 작은 파도가 이어진다. 바다는 한번 숨 고르고 다시 큰 파도를 보내려 한다. 나는 발목과 무릎으로 파도의 리듬감을 느끼며 흥얼거린다.




예술 작품에서도 상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순화와 선택이 이루어진다. 예술적인 이야기들은 현실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것들을 뭉텅 생략해버린다. 예를 들어 기행문에서 화자는 오후 내내 여행을 하여 X라는 산 위의 작은 도시에 도착했고, 그곳의 중세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에 눈을 떠보니 아침 안개가 끼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오후 내내 여행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기차에 앉는다. 배 속에서는 점심을 먹은 것이 잘 내려 가지 않는다. 좌석 덮개는 회색이다. ….(중략) ….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물 한 방울이 먼지에 덮인 유리창에 진흙탕 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차표가 어디 갔나 궁금해진다. 들판을 돌아본다. 계속 비가 내린다. ……(중략)…… 이렇게 자세히 늘어놓아도 ‘그는 오후 내내 여행했다.’라는 기만적인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맨 처음 1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도 다 못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전해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금세 미쳐버릴 것이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27쪽 -



제주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오감을 통해 몸과 마음이 경험(자극)하는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하지만 보통사람인 나는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외부의 모든 자극을 느낀다(감각) 하여도 모두 기억할 수 없다. 사람은 수용된 감각정보 중 일부만 의미 있게 기억하며, 이 마저도 시연과 회상을 반복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망각한다. 하긴 사람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원하려는 이 세상에서 미쳐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적어도 여행의 순간들은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여행 중에 의미 있게 순간을 마주하면 사진을 찍고 짧은 메모를 한다. 그런 순간들을 소유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을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내 곧 고민에 빠진다. 여행 에세이에 그 모든 순간을 담을 수 없서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에세이를 읽는 사람은 몇 줄 읽고 책을 덮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별 수 없이 의미 있는 순간을 선택한다. 김녕 성세기 해변에서 웨딩 촬영하는 행복한 커플과 눈인사를 한 이야기, 이름으로만 상상하면 크고 긴 해안 장성을 연상시키는 환해장성이 실제는 아담했다는 이야기, 해맞이 해안도로를 걷다가 마주친 시각장애인과 도우미의 살가운 모습, 당처물동굴 뒷길에서 만나는 함초밭 이야기 등은 과감히 제외시킨다.





월정리 해변. 반가움 보다 어색함이 먼저 일어서 안타까웠다.

월정리 해안을 들어서자 느닷없는 어색함에 당황한다. 반호를 그리며 이어지는 아름다운 월정리 해변은 그대로인데, 그 해변 풍경과 반도 어울리지 못하는 펜션, 게스트하우스, 카페 등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다고 여기에 사는 분들의 삶의 터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제주의 고유한 색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행원마을 안길을 따라가면 광해군의 유배 기착지 비석이 있는 행원포구가 나온다. 비석에 반사되는 햇빛이 거슬려 밀짚모자를 더 눌러쓰고 눈으로만 비석 내용을 읽어 내려간다. 고사성어 주중적국(舟中敵國)이 잠시 씁쓸하게 다가온다. 주자학을 따르는 조선 유교의 정치철학이 ‘덕치주의(德治主義)’이다 보니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도 임금이 덕을 쌓지 못해 일어난 것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임금도 어쩌지 못하는 자연재해를 임금의 부덕으로 귀결시켰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그 만큼 덕(德)이 조선시대의 중요한 정치적 요체인 것은 알겠다. 그래도 나는 안타깝다. 과연 광해군에게 덕이 없다 말할 수 있으며, 덕으로만 나라를 지킬 수 있단 말인가? 광해군은 조선시대의 무능한 선조를 대신하여 조선 팔도를 직접 누비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수습했다. 또한 국제정세에 밝아 실리적인 중립외교로 명/청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당쟁에 휘말려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제주에 유배를 온 최초의 임금이 되었다. 당시 광해군은 유배지가 제주도인지 모른 채 강화도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배(船)의 사면을 휘장으로 둘러 밖을 볼 수가 없었다. 어등포(행원포구)에 도착했을 때, 광해군의 절망과 탄식이 어떠했을까? 그런 광해군에게 한낱 제주 목사 따위가 주중적국을 언급하다니. 안타깝다 못해 자못 씁쓸했다. 비문을 쓴 사람도 나의 생각에 동조한 듯 아래의 글로 마무리를 했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달리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과 제주 올레길의 공통점은 죽기 전에 한번 해야 하는 도보 여행이라는 것과 피폐해진 영혼을 회복하는 여행이라는 것이다. 18세기 산업 자본주의가 발생한 영국에서도 많은 수의 도시 사람들이 도시에서 완전히 벗어나 시골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자신들의 자유와 선택이 반복적으로 억압 및 박탈당하는 구조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중 하나는 자연을 가까이 두며 여행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는 21세기의 현재까지도 달라진 것이 없다. 현재 도시의 삶은 항상 분주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내일을 위해 가져야 할 휴식은 점점 줄어든다. 오히려 하루를 좀 더 남보다 빨리 시작하려고 스스로를 재촉한다. 심지어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지 않고 다른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라는 불안과 남보다 못 살 거라는 공포 때문이다. 불안과 공포에서 한동안 벗어나 나의 영혼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올레길을 걸으면서 사색하는 것이다.




행원포구의 바다를 뒤로 하고 숲으로 들어선다. 한참 숲길을 걸으면 좌가연대를 마주한다. 좌가연대에 스스럼없이 올라 탁 트인 시야를  내려다보며 짧은 탄성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걷는다. 계룡동과 평대 옛길을 지나면서 나를 반기는 백구 강아지와 잠시 놀고, 풀 뜯는 말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다시 한참을 걷는다. 드디어 낯익은 평대리에 들어서니 반가운 마음과 함께 안도감이 든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해녀박물관이 나올 터이다. 이렇게 수 시간을 걷는 동안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온전히 나만 집중할 수 있는 연속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색이 시작된다. 길을 계속 걸으면서 ‘예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풀고 싶었지만 풀 수 없었던 나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리하면 나의 불안과 공포가 제주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맞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평야를 가로질러 여행하면서 나는 모처럼 아무런 억제 없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집필 중인 스탕달론에 대하여 생각하고, 나의 두 친구 사이에 형성된 불신 관계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 정신이 어려운 관념에 부딪혀 텅 비어버릴  때마다 의식의 흐름은 창밖의 대상에 고정되어 몇 초 동안 그것을 따라간다. 그러다 보면 또 새로운 생각의 똬리가 형성되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술술 풀려나가곤 했다.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저) 84 쪽 -




제주 세화리의 저녁은 7시를 넘기면 모든 것을 멈추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정적으로 들어간다. 도시의 7시는 아직도 한창일 것이며,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야근의 시작이기도 하다. 게다가 도시에서는 밤하늘의 별은 볼 수 조차 없다. 바람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제주 세화리의 7시는 밤의 과묵한 경이로움을 선사하고 다시 귀를 기울이게 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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