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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Feb 10. 2016

제주 여행, 한 손에 '여행의 기술'을 들고

세 번째 이야기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처럼 6시에 깼다. 옷을 입고 나와서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아침 6시. 오랜 기간 동안 고착화된 무의식적인 습관 때문에 도시의 분주한 아침처럼 몸이 자각했다. 스마트폰의 알람이 제구실을 하기 한참 전에 눈이 먼저 떠졌다. 마음은 한가하고 느긋하려 했지만, 몸은 분주하고 민감하게 굴었다. 몸을 마음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눈을 무겁게 다시 감았지만, 눈만 감았을 뿐 잠은 이미 한참을 달아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버렸다. 내가 도시생활에 제법 잘 길들여졌다는 생각을 하면서 옷을 주섬주섬 입고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아직도 새벽이 지배하고 있었고 검회색과 진회색의 구름들이 제멋대로 서로 엉켜 군락을 이룬 채 낮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 뒤로 아주 희미하게 빛나는 햇무리가 보였지만,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새벽의 어둑함을 몰아내기에는 부족한 듯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세화리 아침을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동네 사람 인냥 어슬렁 거리며 세화리 바다를 뒤로 두고 육지 쪽을 줄곧 올려다봤다. 수 분이 지나자 하늘과 땅의 경계선 위로 부끄러이 몸을 숙인 지미봉이 보였다. 익숙함이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다시 포근해졌다. 제주여행은 도시의 고통스러운 습관을 무디게 하거나 아주 적절하게 위로해준다. 문득, 지미봉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고민이나 저항 없이 오늘 오전은 지미봉을 가기로 결정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시인은(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자연 – 그는 이 자연이 무엇보다도 새, 냇물, 수선화,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 이 도시의 삶으로 인한 심리적 피해를 치료하는 불가결한 약이라고 말한다.』  -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저) 186 쪽 -


나는 제주에 혼자 올 때면 호텔이나 일반 숙박업소를 찾지 않고 게스트하우스에 묵는다. 일단, 매우 조용하다. 몇몇의 게스트하우스는 친목도모를 위해 밤새 왁자지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게스트하우스는 제주 주민들이 사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밤 11시이면 소등하고 잠을 청해야 한다. 둘째, 저렴한 숙박비에 조식이 포함되어 있어 비용적인 부담이 없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은 제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의 조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게다가 게스트하우스마다 제공하는 조식이 달라서 은근히 기대하는 재미도 있다. 평대리 홍당무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갓 구운 작은 와플과 따뜻한 수프가 나왔었고, 세화리 도로시 게스트하우스에서는 햄을 얹은 토스트와 스크램블 그리고 커피와 약간의 신선한 과일을 즐겼었다. 셋째, 게스트하우스 호스트가 정성스럽게 제공하는 조식은 별채로 딸린 카페에서 먹는데, 나는 카페에서 조식을 먹는 것을 상당히 즐긴다. 대부분의 카페는 넓지 않고 약간 좁은 편이다. 테이블의 수는 다섯 손가락을 넘기는 일이 거의 없으며, 의자의 수는 테이블 주변을 겨우 채우는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테이블들 사이의 간격은 애매하다. 그러나 이런 공간적 활용이 혼자 여행을 오는 사람의 고립감을 덜어주는 경향이 있다. 서로 잘 모르는 게스트들이 애매한 거리에서 똑같은 조식을 먹으면, 알 수 없는 동질감을 공유한다. 마치 '나만 혼자 온 게 아니구나'라는 유치한 동질감 같은 것이다. 유치하지만 확실히 마음은 덜 외롭다. 오늘 아침도 그런 동질감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호스트가 마련해준 조식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제주해녀박물관으로 향했다.

『일반적으로 공동의 고립감은 혼자서 외로운 사람이 느끼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유익한 효과가 있다. 도로변의 식당이나 심야 카페테리아, 호텔의 로비나 역의 카페 같은 외로운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고립의 느낌을 희석할 수 있고,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독특한 느낌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저) 77 쪽 -



제주해녀박물관을 뒤로 하고 면수동 잔디운동장을 지나 면수동 마을회관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자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갈색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반가움 마음이 일어 가까이 가서 녀석을 보려고 했지만 방해될까 싶어 사진 몇 장만으로 대신했다. 면수동 마을회관에서 왼쪽으로 몸을 틀면 이제부터 제주 밭담과 함께 하도리 해안 포구까지 걸어간다.


밭담을 양 옆에 두고 하도리 해안까지 걷는 동안 나는 자주 길에서 멈추어 사진을 찍고 메모를 남겼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의 대부분은 지평선을 기준으로 볼때 위로는 제주 하늘을 두었고 아래로는 직선 또는 사선으로 열 맞춰 뻗어가는 밭이랑이 두었다. 문득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내게 있어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의미 있는 순간'이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과 조우했을 때 느끼는 사실과 감정을 눈과 마음으로 한참 동안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진은 오랜 시간이 지나 잊게 될지 모르는 순간과 감정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하나의 단서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두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눈과 마음으로 관찰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사진을 통해 덜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나와 조우한 모든 순간과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사진을 이용했는지 모른다. 또한 브런치 포스팅에 대한 허영 때문에 욕심을 부렸는지 모른다. 나를 위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남이 읽어주기 바라는 허영 말이다. 살짝 씁쓸한 미소로 이 모든 생각을 마무리하고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다시 걸었다. 그리고는 얼마 가지 않아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이 내게 찾아왔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한참을 그 순간을 담아낸 후에 다시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었다.


길 한가운데를 두고 하늘이 둘로 갈라진듯하다. 왼쪽 하늘은 더없이 잔잔한 파란 하늘인데 오른쪽 하늘은 비가 올 것 같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거나, 계절과 빛과 날씨가 보기 드물게 조화를 이룬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 …(중략)… 카메라가 하나의 방법이다. 사진을 찍으면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보고 촉발된 근질근질한 소유욕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귀중한 장면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줄어든다. 아니면 아예 우리 자신을 물리적으로 아름다운 장소에 박아놓을 수도 있다.』  -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저) 295~296 쪽 -


『그러나 사진이 그것을 찍는 사람들 다수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열의는 사그라졌다.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저) 305 쪽 -



하도리 포구로 향하는 하도리 밭담 길에서 거칠지만 반듯한 형세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긴 돌벽을 만난다. 돌벽 앞에 그 크기를 가늠하니 굳이 지도를 찾지 않아도 여기가 별방진성임을 알겠다. 별방진성은  고려말부터 우도와 그 주변에 빈번하게 출몰했던 왜구를 막기 위해 중종 5년에 제주 목사 장림이 이곳에 쌓아 올린 성이다. 장림 목사는 성을 쌓고 별방(지금의 하도리)으로 명했다고 한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별방진은 확고한 방어의 기세를 품고 있다. 그러나 성 안으로 들어오면 다소 퉁명스럽지만 확실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좀 더 가까이 성벽으로 다가가서 관찰하니 크기와 모양이 제멋대로인 돌들을 빈틈없이 반듯하게 쌓아 올린 기술에 감탄했다. 감탄이 호기심으로 발동해 별방진성 위로 거침없이 올라가 하도리 포구를 잠시 내려다봤다. 오른쪽을 살피니 작게 보였던 지미봉이 제법 커 보였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다.



여행은 우리가 평소에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하게 여겼던 사물이나 대상 또는 관념들을 아주 간단하게 우리의 관심 밖으로 던져 버린다. 여행은 우리가 도시에서 삶의 영위하는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미덕들을 하찮게 만들고, 반대로 도시에서는 거들떠보지 않은 가치들을  재조명받게 한다.


- 도시의 미덕: 경쟁, 우위, 신속, 정확, 성과, 규칙, 조직, 개발
- 여행의 미덕: 우정, 평등, 여유, 소탈, 낭만, 만족, 자유, 계발

도시에서는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한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정확한 실행력은 우위를 지속시키는 성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며, 그 길을 찾거나 만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규칙을 부여하고, 끓임 없이 부족한 점을 발견하여 보완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행은 같은 길을 타인과 나란히 걷기에 우정과 평등이 발현된다. 거기에 여유로운 만족과 소탈한 낭만이 더해지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삶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리되면 우리는 미쳐 알아차릴 수 없었던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장점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행의 미덕을 그리 오래 누리지 못한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손에 거머쥐는 순간, 우리는 어떠한 저항도 없이 도시의 미덕으로 다시 기울어진다. 아마도 이는 우리의 삶은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늘 고달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고, 여행은 단지 여행일 뿐이라는 고정관념에 묶여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워즈워스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비꼬인 충동들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워즈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그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소간 순응성이 있다는 원칙, 즉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 – 때로는 사물 – 에 따라 변한다는 원칙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반면,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경쟁심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난다. 따라서 A가 지위와 위계에 강박감을 가지고 있다면, 거의 눈치도 못 채는 상태에서 B까지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심지어 A의 농담으로 인해 지금까지 잠복해 있던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슬며시 머리를 내밀 수도 있다. 그러나 B를 다른 환경에 갖다 놓으면, 그의 관심은 새로운 상대에게 반응하며 미묘하게 변할 것이다.』  -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저) 201 ~ 202 쪽 -



가쁜 숨을 몇 번이고 몰아 내쉬며 오른 지미봉은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가졌던 지루함과 고달픔을 일소에 날려주었다. 정상에서 오른편을 내려다보니 종달리 해안도로가 반호를 그리며 성산일출봉까지 내달린 것 같았고, 왼편에는 우도가 심드렁하게 발 뻗고 누워있는  듯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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