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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Jun 28. 2016

제주 여행의 잔상, 여행이 끝난 한 참 후에...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행의 기억과 감각들.

#1. 여상히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가, 창 밖을 바라본다. 요사이 매년 봄마다 날아오는 중국발 황사 탓에 하늘이 누리끼리한 베옷을 입은 듯했는데, 엊그제 줄곧 시원스레 내린 비 덕분에 하늘이 파르스름한 민낯을 드러냈다. 파르스름한 것이 어디인가? 도심 하늘이 새파란 속살을 보여줄 거라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린 지 오래전이었는데... 이 정도의 속살에도 제주 김녕의 파란 하늘을 떠올리는 나는. 아주 쉬운 사람이다.




#2. 턱을 당겨 시선을 아래로 끌어내리니 8차선 도로 양 옆으로 줄지어선 가로수가 보인다. 가로수의 녹초록 가지들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산들바람이 부는 듯하다. 창 바깥사람들을 보니 내가 융통성이 없는 것 같다. 아침 기운이 새초롬하여 긴팔 와이셔츠에 얇은 그레이 카디건을 입었는데  바깥사람들은 죄다 반팔이다. 제주에서도 융통성은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변덕맞은 제주 날씨 탓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제주 날씨에 좀처럼 적응 못하는 맹추였다. 남들은 반팔로 잘만 다니는데 나는 한기에 바람막이 재킷을 입기도 했다. 용눈이 오름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The windows, Marc Chagall, 1925



#3.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손을 뻗어 봄날의 시원스러움을 한 움큼 잡고 싶지만, 사방으로 처댄 강화유리벽에 창문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천장 통풍구에서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공조기 바람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밤새 가라앉았던 마른 먼지가 색이 바랜 낡은 카펫트을 밟을 때마다 느껴지고, 어제 훔쳐 닦았던 책상의 먼지가 딱 그만큼 고스란히 다시 쌓여있는 것을 볼 때 뭔가 다 부질없는 것 같다. 결국, 날은 좋은데 사무실에만 있는 것에 싫증이 나서 점심을 거르고 무작정 밖을 나서기로 했다.




#4. 사무실로 가는 고층부 승강기를 탈 때마다, 나는 제주의 오름을 떠올린다. 나의 의식적인 기억 인출이 아니다. 과거에 지각했던 순간의 기억 표상이 자동으로 생성되어 의식화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건, 제주 오름에서 벌겋게 불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거스를 수 없는 벅찬 감정을 고층빌딩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5-1. 제주 공천포 게스트하우스 “HelloMay”를 보고 나서야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진실을 믿게 되었다. 건축이 말을 건다는 것을. 그것도 늘 끓임 없이 일상처럼. 대문과 입구, 창문의 모양과 위치, 문과 문고리 생김새, 벽의 색상과 질감, 공간의 외로움과  따뜻함, 지붕의 널찍함과 높이, 현관과 마당 사이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세월이 어울려 켜켜이 쌓인 흔적들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제주 여행의 하루를 좀 더 특별히 만들어 주겠노라고. 그날, 게스트하우스 별채로 있는 카페에서 밤늦게 혼자서 특별한 늦은 밤을 누렸다.

#5-2. 기왕 점심을 거르고 사무실을 나온 김에, 역삼역 왕풍뎅이 건물 근처 즈음에서 반환점을 찍기로 했다. 강남대로 양옆으로 어깨를 한껏 올린 빌딩들에 가려진 채로 따닥따닥 붙어 있는 빌라와 연립주택의 골목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커피전문점 “All that coffee”에 들어갔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테이크 아웃 컵을 받아 들었을 때, 이거였나 싶었다. HelloMay의 올빼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6. 일요일 오전. 짬이 생겼다. 딱히 갈 곳을 정해두지 않은 탓에 내키는 대로 걷는다. 향할 곳이 없다 보니 서두름이 없다. 편안히 나의 감각을 열어 세상을 지각한다. 초여름의 산들거리는 바람이 팔을 휘 훑고 지나간다. 살짝 맴돌다 멈추어 버리는 바람이 아니다. 나무의 굵은 가지들의 여밈은 그대로인데 가지 끝에 매달린 잎가지의 놀림은 앙증맞기 그지없다. 지루하고 고루한 나의 일상에 이러한 작은 계절의 몸짓은 나를 꿈틀거리게 한다. 그냥, 가고 싶은 것이다. 여행이. 다시 가고 싶은 것이다. 제주로.

 



#7. 작년에 제주행 비행기 창 밖으로 육지를 내려다봤을 때, 복잡한 도심과 그 속에서의 분주한 삶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슬며시 나의 입꼬리가 낙락하게 올라갔더랬다. 그러나, 지금. 작약한 비행기가 하늘에 투명하게 난 점들을 이어가며 유유히 그리고 태연히 날아가는 것을 보니, 슬슬 배가 아프다. 이제야 깨닫는다. 이리저리 바쁘고 어수선한 몸부림이 아니라 나름 정연한 움직임이라는 것을. 암튼, 비행기가 날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여행의 아쉬운 끝이 아니라, 여행의 부푼 시작인 듯하다.




#8. 평대리 바다에서 우연히 조우했던 저녁 하늘과 보름달을 동네 공원에서 다시 회우했다고 말한다면, 나의 억지일까? 저 순간의 현상이 내 속에 자리 잡은 제주의 심상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면, 정말 나의 억설일까?



 

#9.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바라볼 때, 인간이 만든 몇 가지 발명품을 조합하면 매우 훌륭한 광경을 누릴 수 있다.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는 큰 창, 등을 기댈 수 있는 의자, 집중을 도와주는 적당한 조명 또는 어둑하지만 따뜻한 컴컴함. 큰 맘을 먹고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어느 미술관 2층에서 제주 세화의 풍광을 다시 떠올렸다.



#10. 작년 이맘때. 평대리 저녁에 취해 한 손에 맥주캔 들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계춘할망 촬영장. 이때는 제목만 듣고 마파도 같은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드라마 영화일 줄이야.


Fin.


※ 글 속 그림 : 마르크 샤갈의 The Window (마르크 샤갈의 작품세계에 알고 싶다면)

※ 글과 사진의 상업적인 용도 사용 및 무단 편집 이후 게시를 하면 법적 처벌을 받습니다.

※ 그림 출처

    - Painting : Wikiart.org

    - 출처 사이트에서 사진은 오직 온라인 게시만 가능하며, 정보전달 및 교육적 목적 이외에 상업적 용도 사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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