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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Sep 22. 2016

제주 여행, 사람 그리고 풍경

사려니 숲길 그리고 신평-무릉 곶자왈

A Entrance, Saryeoni Forest Trail / Aug. 2016

해가 서쪽으로 누울 준비를 하려고 막 기울 때 즈음에 사려니 숲으로 들어섰다. 상쾌한 간들바람에 서그럭거리는 나뭇가지들의 그늘 아래로 나의 땀이 식는다. 네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부대끼지 않을 산책로. 그 가운데를 걷는다. 숲은 신비롭고 흙길은 차분하다.


A narrow path, Shinpyeong Gotjawal / Aug, 2018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 한참을 걷다 지친 끝에 도달한 곶자왈의 초입. 나무들 사이로 파고드는 골바람에 섶비빔질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갠소름한 길이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있고, 길섭에 크고 작은 잎나무들과 잡풀들이 겨르롭다.



사려니의 잎 푸른 장막(왼쪽)과 곶자왈의 잎 마른 융단(오른쪽). 융단 위를 걸을 때는 사북사북 소리가 난다. 마치 지난밤에 제법 소복하게 쌓인 눈 위를 밟는 것 같다.



in the middle of Saryeoni Forest Trail / Aug, 2016

사려니 숲길 한가운데를 홀로 걷는 것을 꿈꾸었다. 숲길 양편의 나무들 사이로 작은 새들이 포롱 거리고 바람도 소소히 내내 불 줄 알았다. 평화롭고 고요하나 전혀 쓸쓸하지 않을 줄 알았다. 처음 한동안은 실로 기대가 현실과 같았다. 그러나 넓은 너비의 단조로운 길을 계속 걷자니 점점 지루해졌다. 게다가 바람은 간헐적이어서 등에 나는 땀은 가실 줄 몰랐으며, 까마귀가 주변을 도닐며 음침하게 울어댔고, 사람이 없어 심심했다.


A pathway, Shinpyeong Gotjawal / Aug, 2016

사람이 관리하는 사려니와 달리 신평 곶자왈의 숲길은 거칠고 투박하다. 숲길의 폭은 좁아 나란히 걸을 수 없다.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숲은 거센 기세로 서슴없이 내게 달려든다. 꺼끌꺼끌한 잡풀의 입과 잡목의 가시들에게 순순히 내 종아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핸드폰은 터지지 않아 지루할 겨를도 없었다.


아스팔트로 정비된 널찍한 길. 그 너른한 덕분에 느긋하게 숲길의 여유를 누렸으나, 숲의 속살을 좀더 가까히 느낄 수는 없었다. / An asphalt, Saryeoni


신평 곶자왈의 상동나무 오솔길과 왕쥐똥나무 오솔길. 등을 타고 어깨 위로 뻗어간 듯한 나무들의 원가지와 곁가지들이 크게 어우러져 사늑한 숲길을 만들어냈다. 좁고 호젓한 숲길이 아늑하니 마치 숲이 나를 가까이 곁에 두고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사려니 숲길보다는 좀 더 살가왔어라.


사려니 교래리 입구에서부터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주친 두 가족. 서로 나란히 걸으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무척 정겹다. 젊은 부모는 아기가 행여나 불편할까 싶어 살갑게 붙으며 걷고, 장년 부모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아들을 존중해주려는 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듯했다.


햇살에 반사된 물비늘이 눈부시도록 빛이 났다. - A stream, Saryeoni Forest / Aug, 2016


The Jeongaewat, Shinpyeong Gotjawal / Aug, 2016

오솔길을 빠져나오면 초록띠의 잔물결이 남실거리는 새왓(띠밭)을 만난다. 근처 표지판에는 곶자왈 잔디밭으로 적혀있으나, 여물어가는 띠들로 무성하다. 아마도 여기가 정개왓 광장인 듯싶다. 정씨 성을 가진 일가가 여기서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 여길 지나면 무릉 곶자왈, 아름다운 숲길이 시작될 터이다.



The Walden Cedars Forest / Aug, 2016

새왓내 순환로는 한시적으로 폐쇄되었고, 물찻오름으로 가는 입구도 막혔다. 물찻오름 개방시간이 정해져 있는지 몰랐고, 그 기간조차 몰랐다. 그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섭섭하고도 꺼림 텁텁한 마음이 감춰지지 않던 중에 월든 삼거리에서 삼나무 숲과 조우했다. 사려니 숲길이 그저 단조롭고 무료하다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 그제야 알았다. 80여 년의 유장한 세월을 증명하듯 삼나무 숲의 웅장함은 나를 잠시 말을 잃게 만든다. 해가 더 서쪽으로 기울었는지 약한 붉디란 햇볕이 삼나무 숲의 옆구리를 내리쬔다. 마침 맞은 편에 자매 같은 모녀가 재잘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Slash-and-burn feilds mady by Family Jung, Mureung Gotjawal / Aug, 2016

정개왓 광장을 지나면 언틀만틀 쌓아 올린 강담들이 숲길을 따라온다. 그 주변은 제 몸을 꺾고 비틀며 뻗어간 가지들로 무성한 종가시나무들이 즐비하다. 무엇이 원가지이고 곁가지인지 알 수 없다. 여기도 정씨 일가의 화전밭 흔적이다. 그리고 군데군데 숯굽터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종가시나무로 숯을 구운 것 같다.



A Jat-Sung(Jeju traditional horsefarm) Mureung Gotjawal / Aug, 2016

언뜻 보면 또 다른 정개밭인지 숯굽터인지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찾아보니 여기는 제주 잣성의 유적이었다. 잣성은 조선 초기 제주 중간산 지역의 목초지에 만들어진 경계용 돌담이다. 고려시대 원나라 점령기 때부터 제주는 말의 사육과 공급에 최적지였다. 그러나 해안가 목초지에 목장을 두고 말을 키우는 탓에 근처 경작지 피해가 많았다. 그러던 중에 고득종의 건으로 세종 11년(1492년)에 8월 중산간 지대에 목장 설치가 착수되어 이듬해 2월에 완성되었다. 이때 목장을 10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10 소장(所場) 체계가 갖추어졌다. 제주목 지역에는 1 소장부터 6 소장, 대정현 지역에는 7 소장과 8 소장, 그리고 정의현 지역에는 9 소장과 10 소장을 두었다. 내가 마주한 잣성은 대정현의 안덕면과 중문면의 중간산지역의 7, 8 소장이었다.



아름다움은 우열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가늠하고 수용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아름다운 두 숲길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어느 숲길이 더 아름답다 판단할 수 없었다. 부분을 알고서 전체를 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제 겨우 한번 8월 늦여름의 사려니와 곶자왈을 봤을 뿐이었다.



조금씩 어둑해질 무렵에 사려니 가시리 입구에 도착했다. 교래 사거리로 가는 730번 버스를 타려면 이십여분은 기다려야 했다. 해는 완전히 누울 준비가 된 것 같았고, 도로의 차들은 요란스럽게 바람을 내며 쌩쌩거렸다.


무릉 곶자왈의 농로를 지나 도로를 건너 무릉리로  향했다. 목은 말랐으나 물이 없어 갈증이 심했다. 게다가 버스정류소를 착각한 바람에 인향동 사거리까지 줄달음을 쳐야 했다. 가까스로 도착해 버스를 타고 보니 그제야 배낭 옆주머니에 먹다 남은 물병이 있는 줄 알았다.


to be continued...


※ 참고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잣성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0 소장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의 울타리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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