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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Feb 06. 2017

제주 여행, 사람 그리고 풍경

화순금에서 모슬포까지 그리고 모슬포에서 신평리까지


화순리의 그녀는 750-1 버스가 안덕 우체국에 다다를 때까지 간간히 내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그리고 누구와 왔는지. 내가 퉁명스러운 듯 짧게 답하니,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볕도 매섭고 바람도 없는 이런 날에 혼자 무슨 재미로 제주까지 와서 걷냐고. 거친 피부에 투박한 잔주름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녀의 곱디 고운 미소에 맥이 탁 풀려 싱겁게 웃고 말았다. 그녀는 버스에 일어나 손수 방향을 가리키며 화순금 모래 해변을 가보라 했다. 검은 모래 속에 숨은 금빛 알갱이들이 파도에 떠밀려 올라오면 알알히 빛날 거라고. 직접 가서 보니, 실로 그러하였다.



남제주 요양원 주차장 맞은편에 연꽃밭이 있었다. 연꽃 개화시기가 7~8월이라 봉우리가 우뚝 솟고 꽃잎이 만개한 홍련과 백련을 목도할 줄 알았건만, 기대는 보기 좋게 사그라졌다. 연꽃밭은 지척의 모슬포항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심드렁한 듯 손등과 손바닥을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연꽃밭 넘어 보이는 재는 하염없이 멀어 보이고, 그 뒤로 모슬봉이 어렴풋이 보인다. 제주 올레 11 코스의 첫 시작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잔잔히 밀려오는 화순금 파도에 발을 담그며 금빛에 물들어 보려다 오른편을 보니 거대한 산이 보인다. 산방산. 산방산은 성산 일출봉 못지않은 기암괴석을 온몸에 두른 채 넓은 구릉이 육지 쪽으로 완만히 내려오는 산이다. 주변의 오름들과 달리 분화구가 없다. 주변과 다른 만큼 재밌는 전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사냥꾼이 한라산 정상 즈음에서 사슴을 사냥하려고 쏜 화살이 엉뚱하게도 구름 속에 쉬고 있던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맞춘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가까이에 있던 한라산 꼭대기를 집어던져 버렸는데 그게 산방산이고, 패인 자리가 백록담이다.(참고 - 세계제주자연유산센터 블로그) 그럴싸한 이야기에 피식거리며 산방산을 한동안 멀찌감치 바라본다. 산방산 머리 위를 낮게 훑으며 흘러가는 먹구름이 인상적이다.



연꽃밭을 등지고 모슬봉으로 향한다. 소소한 밭길을 거쳐 군부대로 향하는 도로를 가로질르면 올레 리본이 달린 모슬봉 숲길 초입에 다다른다. 제법 우거진 진녹색의 숲 터널을 지나면 점점 길이 넓어지다가 어느새 모슬봉 공동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대정읍 상모리 공동묘지. 대정읍의 7개 마을의 공동묘지이다. 7개 마을 이외에는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 모슬봉으로 올라가는 길과 그 반대편 지어진 휴게실로 내려가는 길에 크고 작은 분봉과 비석들이 제법 자리를 갖추고 있다. 간혹 길 한쪽에 매우 가까이 모셔진 비석 없는 묘지들도 보였다. 죽은 자들 가운데 산 자가 조용히 발소리만 내며 걸었다.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거나 오르막길에 함께 따라오는 고된 숨소리를 거칠게 내쉬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건해지려고 억지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높푸른 하늘 아래에서 곤한 잠을 자고 있을 그들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사계항 마라도 잠수함 선착장 맞은 편에 있는 빨간 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연인들이 보였다. 촌스러운 빨간색 등대라고 생각했는데, 연인들을 보니 오히려 내 생각이 촌스러웠다.




먹구름들 사이로 간간히 파아란 쪽빛 하늘이 보이기에 바람과 함께 이내 물러날 떼구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머흘머흘 흘러간다 싶더니 기어이 햇빛을 삼키고 짧은 소나기를 뿌린다. 머리에 떨어진 빗물을 털어내며 송악산 남쪽 끝에서 가파도를 바라본다. 가파도 지나 구름 발치 넘어 더 먼 곳에서는 희푸른 햇빛 기둥이 이루고 있었다. 고까운 제주 날씨에 안타까웠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


8월 말의 대정읍 동일리는 분주하다. 대형 트랙터가 굉음을 내며 앞으로 힘차게 밭을 갈면 흙먼지가 크게 일어난다. 고르게 갈려진 밭에 화려한 색의 농모와 몸빼바지를 입으신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앉아 땅에 마늘을 묻고 탁탁 두드린다. 그들에게는 평범한 하루의 한 부분일 수 있으나,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평온이 느껴지는 인상적인 장면일 수 있다. 그 마음을 아는지 소소소 부는 바람에 논벼들이 차르륵 거리며 장단을 맞췄다.



여름비를 잔뜩 머금었던 매지구름이 일순간에 수 백만의 빗방울들을 송악산 위로 사정없이 뿌려댄다. 메말라 있던 목재 난간과 산책로가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비를 피할 곳이 없어 냅다 줄달음을 치다가 우람한 나무 밑에 겨우 몸을 바짝 붙였다. 하늘이 탈이 난 것 같았다. 도시에서 여름비가 내리면 강렬한 햇볕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도로와 보도블록이 젖는 냄새가 난다.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풀내음, 흙내음, 나무 내음이 난다. 게다가 색도 젖어가는 내음만큼 진해진다. 물론 둘 다 비를 맞지 않고 느껴야 더 좋다.


죽염 한 꼬집을 입에 털어 넣고 미지근한 물로 헹구어 마셨다. 등은 이미 흠뻑 땀으로 범벅이었다. 땡볕의 도로를 걷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간혹 웽웽거리며 달려가는 자동차들 덕분에 앞뒤를 살피며 걸어야 했다. 그렇게 지루한 걸음이 될 줄 알았는데, 신평리 마을도로(추사로 247번 길, 신평리 187) 옆 건물벽 아래에 빨간색 꽃들이 화사하게 폈다. 덕분에 눈이 즐거웠다.



거대한 물리적 외연에 휘감긴 대도시에서 우리는 복잡한 심리적 관계 속에 나와 다른 타자를 자주 대한다. 이 곳에서 타자는 가벼운 인사도 나누기 어려운 상대다. 나와 타자의 삶이 비교적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모르는 타자에게 나는 환대보다는 두려움과 위험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의 일방적인 호기심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내게 익숙치 않은 일이다. 그런 낯섦이 여행을 가면 약간 누그러는데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여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설렘 때문이거나, 여행 중에 경험한 자연적 감동에 누그러진 마음 때문이거나 혹은 여행지의 새로운 이방인이 되어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지 않은 시간을 갖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송악산의 폭풍우와 모슬봉의 땡볕 속에서 계속 마주쳤던 부부가 있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몇 번 조우했다는 이유 만으로 우리들은 인사를 했고, 같이 차를 마셨으며, 가족의 사진을 서로 나눠봤으며, 서로의 여행을 격려했다. 송악산에서 마신 커피는 진하디 진했다.


주름진 손들이 내게 손짓을 한다. 점심 새참을 소박하게 마치고 냉커피를 나눠 마시던 하르방님과 할망님들이 나를 불러 앉혔다. 집에서 얼린 얼음에 믹스커피를 부은 종이컵을 내게 건네며 화순리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질문을 쏟아낸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그들의 수다에 뛰어들어 궁금했던 것들을 되물어본다. 자연스러운 듯 어색하게, 어색한 듯 친숙하게.




Cloudy Sky. Twilight. -1893, Isaac Levitan

억센 빗줄기에 흠씬 두들겨 맞으며 섯알오름 4.3 유적지로 가는 초입길과 땀 뻘뻘 흘리며 신평 곶자왈로 가는 신평리의 어느 귤밭에서 무의식적으로 멈추었다. 어디서 본듯하면서 언젠가 느꼈던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서로 비벼가며 나의 머리를 헤집었다. 급하게 정리한 결론은 어디서 내가 봤던 미술 작품과 맞닿아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그 미술 작품을 다시 찾고 그 화가의 또 다른 작품들을 봤을 때 깨달았다. 풍경이 인간에게 주는 섬세한 위안의 감정들을 작가와 내가 똑같이 느꼈다는 것을. 캔버스에 화가의 독특한 상상력과 화법으로 그려내어 감정을 더욱 극대화시켰고, 나는 그저 사진 셔터를 누른 것 밖에 없었다.

Olive Grove - 1889, Vicent van Gogh

수년 전만 해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서 빛이 바래고, 색이 오래되고, 녹이 슬어가는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내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작품을 만들어 파는 것보다 현상을 철저히 찍는 사진 기술을 배워 사진관을 하는 게 삶이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과 유홍준의 책을 통해서 예술 작품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위로를 주는지 간접 체험을 하게 되었고, 실제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이 진실인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일상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감각들을 예술가들이 그들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방법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볼 때, 나 또한 그들과 마음이 같다는 공감이 생긴다. 어쩌면 보통의 말처럼 내가 이런 그림에 매료되어 위안을 받는 것도 예술가가 나의 감정을 골라냈다고 착각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여행의 기술, 260~261 페이지, 알랭 드 보통 저


4.3 유적지(섯알오름 학살터)로 향하는 중간에 일제가 제주도민을 강제 부역을 시켜 만든 고사포진지를 지날 때 즈음, 새찬 비가 점점 잦아들려 했다. 진지 주변에 비안개가 깔린 탓인지 적막한 분위기를 느꼈다. 진지 안팎에는 잡풀이 우거져 풀과 잎을 털어내리는 빗소리가 스산스러웠다. 그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그곳을 지나는 것뿐이었다.


정난주 마리아 성지를 가는 길에 대정리 밭들 가운데 우뚝 서있는 십자가가 있었다. 조금 전 할망이 말씀하신 덕분에 그곳이 가톨릭 공동묘지인 것을 알았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길 옆에 서있는 십자가를 난데없다고 여길지 모를 것 같다. 정난주 마리아 성지에 들러 타오르는 듯한 머리에 시원한 물을 뿌리고 그녀의 동상을 가까이 바라보는데 갑자기 검은 차 들어선다. 차에 내리는 건 소형 카메라를 든 젊은 여성과 제주 방언을 쉴 새 없이 내놓는 할망님이었다. 용기 내어 물으니 제주방언을 지키기 위해 연구하는 연구원 분이 할망님을 모시고 다니며 제주방언을 기록하는 거였다. 흔치 않은 광경에 두 분을 가까이 찍고 싶었지만 실례일 것 같아 멀리서 뒷모습을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할망, 이건 무싱거옌? 말씀해 주십서?"




한 길은 알뜨랑 비행장으로 향하는 빗길이고, 다른 한길을 정난주 마리아 성지로 가는 마른 길이다. 두 길 모두 걷기에 불편했다. 윗 쪽은 진흙에 푹푹 빠지고, 다른 아래쪽은 흙먼지가 날렸다. 고생한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트레킹 신발도 애꿎게 고생했다.



모슬포항에 점점 다가갈수록 해가 구름들 사이로 광채와 함께 진파란 하늘을 드러낸다. 거룩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다음날 신평 곶자왈을 다녀온 후, 저녁 항구에 머물던 검붉은 해가 다시 수면으로 내려가며 사방에 풀어내는 진홍의 그라데이션을 바라봤다.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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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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