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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미 Oct 09. 2022

소설 고라니14

노루

  오소리와 함께했던 정기간행물 발간 프로젝트는 무사히 끝났다. 정기간행물의 판형부터 시작해서 표지 디자인과 본문의 편집 틀을 바꿨다. 그리고 시각화를 위해서 인포그래픽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호응도 좋았다. 책이 표지부터 눈에 확 띈다, 내용도 읽기 편하다는 등 호평 일색이었다. 나는 뿌듯했다. 내가 공들인 만큼의 결과가 나와서 좋았고 또 내가 그 업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만큼 나를 경계하는 그룹은 더 많이 생겨난 듯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시 배치된 곳은 사마귀가 팀장으로 있는 부서였다. 사마귀는 나보다 5년 먼저 입사한 선배지만 나와는 동갑내기다. 내가 여기 입사하기 전에 다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사마귀와 같은 기수로 입사해 있을 수도 있었다. 사마귀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자그마했다. 예전에는 항상 생글거리면서 사람들을 대했다. 그래서 나와는 달리 참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역시나 사람은 알 수가 없는 존재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마귀가 명절 때마다 간부들에게 선물을 보낸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점심식사 대접으로도 모자라 자처해서 술자리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새로 온 대표이사에게도 선물을 보내는 통에 적잖이 주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게 사실인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다.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크게 좌절한 바도 있었다.

  어쨌든 여기저기서 쑥덕거려 봤자 왁왁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결국은 그런 사람이 앞서가기 마련인가 보다. 사마귀는 벌써 3년 전에 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한 팀이 되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강물에 서 있는 나무를 밀어내려고 물결이 덮쳐와 때려도 나무는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고 물결이 나무를 괴롭히는 듯하지만 일렁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게 되어 있다. 물에 젖은 가지가 흔들릴 수는 있지만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사마귀는 나를 휘어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럴 때마다 자주 휘두르는 것이 바로 상사의 권위였다. 업무에 관해서라면 나도 대응이 마땅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최종 결재권자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나는 자괴감에 갈등하면서도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런 사마귀의 행동은 비단 나 하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팀 전체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들 말은 안 했지만 사마귀의 강압적인 자세에 힘들어했다.

  그즈음 갑자기 결원이 생기는 바람에 우리 사무실로 새로운 팀원인 노루가 이동해 왔다. 노루는 단아한 용모에 가느다란 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옷차림도 세련돼 보였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귀 뒤로 넘겨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분명 눈에 띄는 외모였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노루는 내 건너편 자리인데다가 담당 파트가 달라서 나는 처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업무 도중 피곤한 눈을 쉬게 하려고 모니터에서 벗어나 잠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소울강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흐르고 있는 창밖을 주시하고 있는 노루의 젖은 눈망울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것은 그리움이다.     


  나는 그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강물에 대한 동경,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갈구. 내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아마 나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노루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내 눈에 비친 노루는 항상 침착하고 당황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평범한 후배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활달하게 웃다가 그 웃음이 가신 얼굴에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늘이었다. 그 그늘에 나는 마음이 쓰였다.     


  여느 때와 같이 사무실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다가 먼저 출근해 있는 노루를 보았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 노루 씨 일찍 왔네요.”

  마침 오늘은 노루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업무에 필요한 데이터를 받는 일이었다. 아직 업무 시간 전이기는 했지만 잊기 전에 미리 얘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난번에 백업해 둔 데이터 있지요? 그거 오늘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지금 드릴게요.”

  노루는 빠른 손놀림으로 데이터를 복사한 USB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바로 내 자리로 돌아오려다 뒤를 돌아보고 나는 노루에게 말을 건넸다.

  “노루 씨, 혹시 오늘 점심에 약속 있어요? 약속 없으면 식사 같이 할까요?”

  “아, 좋아요.”

  노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오는 이탈리안 식당, 노루와 나는 전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창가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노루는 채식주의자라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이곳으로 왔다. 근처에서도 인기 맛집으로 항상 줄을 서야만 들어올 수 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딱 한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나는 파스타 2개와 화덕피자를 주문했다. 약간 많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밥 사 주겠다고 데리고 와서는 부족하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는 상투적인 질문들로 시작했다. 나이는 몇 살인지 집은 어디인지 이런 일상적인 내용이었다. 노루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노루는 입사한 지 이제 1년이 지났고 지금은 29살이라고 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나이다. 반짝반짝 빛날 때이다. 나는 약간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노루는 일류 대학은 아니어도 누구나 알 만한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고 했다. 우리 업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분야라서 나는 깜짝 놀랐다. 게다가 내 주변에서 실제로 예술가를 보게 될 줄이야. 예전 학생 때 보았던 영화 <까미유 끌로델>이 생각났다. 아, 그 예쁜 조각가랑 이미지도 비슷하네.

  “왜 전공을 살리지 않았어요? 적성에 안 맞았어요?”

  “아니요, 저 지금도 조각하는 거 좋아해요. 그런데 집안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아쉽기는 한데 어쩔 수 없었어요.”

  왜인지 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잠깐 사이를 두고 나는 말했다.

  “기회는 분명히 또 있어요. 그 마음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항상 생각하세요.”

  그건 내 진심이었다. 내 가슴속에도 아직 불이 살아 있다. 예전에는 나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타올랐던 적이 있었다. 그때만큼 활활 타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아직도 이글거리고 있다. 나는 소울강가에서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고통에 울부짖던 그때를.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어요, 내 모든 열정을 다 쏟았던 때가. 지금은 보다시피 이렇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노루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빛에 이끌리듯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입사 이후로 내가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이렇게 내 속을 털어놓은 사람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도 노루의 촉촉한 눈망울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강물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바라보던 그 눈망울.

  한편으로는 미어캣 생각도 했다. 노루도 미어캣처럼 될 수도 있어. 사람이란 건 알 수 없는 존재니까. 그래서 이내 씁쓸함에 젖었지만 나는 그냥 털어 버리기로 했다. 내 진심이 닿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내가 누구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내 얘기를 한 것이고 또 그건 사실이니까 다른 데로 말이 퍼져도 난 개의치 않는다. 혹시나 노루가 미어캣처럼 변한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노루의 그 눈망울을 믿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이다.

  “저 남동생이 있는데 좀 아파요. 부모님은 시골에 계시고 저랑 남동생하고 여기서 같이 살고 있어요. 그래서 조각 공부를 포기하고 직장을 구했어요.”

  노루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동기들은 대부분 외국으로 유학 갔어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그럴 형편도 안 되고 제가 동생도 보살펴야 해서 돈이 필요했어요.”

  “노루 씨, 정말로 좋아하는 거라면 기회는 꼭 올 거예요. 내가 예전에 정말로 좋아하던 얘기가 있는데 한번 들어 볼래요? 기회의 여신에 대한 얘기 알아요?”

  “그게 뭐예요? 알려 주세요.”

  “기회의 여신은 평범한 인간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앞에 머리카락이 아주 무성하대요. 그런데 뒤통수는 대머리인 거예요. 그러니까 기회의 여신을 잡으려면 나를 스쳐 지나가기 전에 그 머리카락을 잡아야 하는 거예요. 나를 지나가고 나서 잡으려고 하면 대머리라서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는 거지요. 노루 씨가 정말로 조각을 하고 싶다면 지금 준비를 충분히 해 두세요. 기회의 여신이 언제 지나갈지는 아무도 몰라요. 너무나 평범해서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나쳐 버리면 그때는 이미 늦은 거예요. 나도 아직 준비 중이에요. 언제 기회의 여신을 만나게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난 기회의 여신이 지나가면 바로 알아볼 수 있어요. 그리고 난 분명히 잡을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는 파스타가 차갑게 식어 버린 것도 모르고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선배님, 오늘 감사했어요. 저 오늘 굉장히 즐거웠어요.”

  “나도 노루 씨랑 시간 보내서 즐거웠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종종 만나요.”

  그 이후로 노루와는 가끔 만나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내게는 그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미어캣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루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굳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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