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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바로가 Nov 04. 2024

시인 박성우의 "두꺼비"

두꺼비와 양손의 관계를 아는 것이 이 시의 전체적인 어조를 알기 쉽게 도와준다. 


어떻게 두꺼비가 아버지 양손에 살았을까?


아마 시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맨 마지막 시행에 꽂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번 읽을수록 그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양손에 사는 것이 아니라 우툴두툴한 그 양손이 두꺼비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임을 점점 깨닫게 된다. 


우리는 아버지가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워셨다는 첫 번째 연에서 혹시 아버지가 동물애호가인지를 추측해본다. 그런데 두 번째 연에서는 아버지가 그 두꺼비를 애지중지한 것을 시샘한 화자가 결국 아버지의 두꺼비를 만지고 나서 눈이 충혈되게 울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질투였을까? 아니면 그 무엇이었을까? 


시적화자는 2연에서 두꺼비를 만져보고는 두꺼비가 싫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3연을 보면 아버지는 시적 화자뿐만 아니라 식구들에게도 자신이 키우는 두꺼비를 보여주시는 것을 꺼려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튀어 나온다. 두꺼비가 너무 못생겨서? 아님 2연에 나온 말처럼 그 두꺼비가 정말 독기가 심해서  위험해 그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갖은 상상력이 동원하며 왜 아버지가 키우는 두꺼비가 시적 화자의 눈을 충혈시키고 다른 식구들에게 보여주기를 꺼리게 하는 동물이 되었는지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다가 3연에서 마침내 우리는 단서를 찾게 된다. 그 보여주기 싫었던 두꺼비는 칠순전 막일판 나가시는 아버지의 손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고 표현된다. 그리고 그 녀석(두꺼비)를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 놓고 페달을 밟았다고 아버지의 동작을 간단하게 묘사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버지 손에서 사는 두꺼비가 사실은 그 동안 고되고 힘든 일을 한 아버지의 손을 '두꺼비'라는 동물로 묘사해서 여태까지 우리에게 설명한 것이구나를 깨닫게 된다.


4 연은 우리가 잘 아는 전래동요인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해맑은 아이들의 동요를 그 다음 5연에 나오는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을 시켰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아버지의 손을 두꺼비로 바라보던 순수했던 눈을 예전으로 돌린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손등 감촉에서 두꺼비의 거칠거칠한 살결은 만져본 후 철이 들었다. 그랬던 시적화자는 이야기를 집이라는 소재로 귀환시킨다. 특히, 5연에서 시적화자는 그렇게 고생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1평도 안되는 좁은 땅에서 그 해 긴겨울잠을 주무셨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전래동요의 '두꺼비'에게 원했던 "새집"과 아버지의 "무덤"이 


함께 '집'이라는 같은 이미지로 겹침을 목격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요처럼 쉽게 두꺼비로부터 새집을 얻을 수 없었던 희망고문같았던 아버지의 안쓰러운 삶의 비애와 애환을 마음 아프게 느끼된다. 


그럼에도 


내 아버지의 양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라는 말로 마무리하면서 아버지의 고된 삶을 다시 기리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3연에서 드러난 두꺼비의 정체가 5연의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필멸성에서 꺾이는 듯 했으나 그 어려운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두 손에서 살았던 두꺼비로 표현한다. 그 두꺼비의 피부는 너무 거칠어 어린 시적 화자를 눈을 퉁퉁 붓게 할 만큼 울게 만들 정도로 매정하고 무심한 현실의 무게였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칠순을 가까이 보는 나이에도 막일판에 나가서 삶의 엄중함을 양손의 두꺼비 두 마리로 버텨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집이라곤 죽어서 얻게 된 작은 무덤이었기에 시적 화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에 잔디만 깨어났다"는 무심한 어조로 5연을 마무리한다. 아마 이 5연이 시인의 감정과 죄책감을 최대한 눌러야 하는 연이기 때문에 마음적으로 가장 힘들게 썼을 연이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끝까지 아버지의 양손에 살았던 두꺼비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의 양손에 살았던 두꺼비 덕분에 시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시인이 문학인눈으로 아버지의 손을 거북이 등껍질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있는 두꺼비라고 묘사한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아마도 시인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을 것 같은 노동자의 손에서 

무엇인가 이뤄낼 있는 두꺼비의 상징을 표현함으로써

두꺼비라는 동물이 가진 희망(새집을 갖다 줄 수 있는 희망)을 보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박성우시인 #두꺼비 #박성우시인의두꺼비 #그럼에도삶은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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