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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배운 책육아

많이 읽기’보다 ‘함께 읽기’를 배우다

by 임지혜

하루하루 버티기만 하던 육아에도 조금씩 리듬이 생겼다.

첫돌 무렵, 아이는 《똑게육아》에서 말하던 ‘먹놀잠’ 루틴에 점점 맞춰졌다. 먹고, 놀고, 낮잠 자는 흐름이 네 시간 단위로 반복됐다. 예측 가능한 하루가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달콤했다. 더군다나 두 달 뒤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루는 놀이터에서 우연히 아동 전집 회사의 영업사원을 만났다. 호기심 반, 경계심 반으로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우리 집에 있는 아이 책이라고 해봐야, 출산을 앞둔 나에게 친정엄마가 보내준 그림책 전집 한 질이 전부였다. “요즘은 아기 때부터 책 읽어줘야 한다.”며 보내준 책은 흑백 초점책, 버튼을 누르면 동요가 나오는 사운드북, 팝업북이었다. 책이라기보다 장난감에 가까운 것들이었지만, 아이는 그것들로 잘 놀았다. 솔직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영업사원은 책 소개에 앞서 복잡하게 얽힌 뇌의 시냅스 이미지를 내밀었다.

“지금 아이의 뇌는 하루하루가 골든타임이에요. 이 시기에 자극이 없으면 시냅스가 끊어집니다. 연결이 많을수록 아이의 뇌는 더 활발하게 발달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놀고, 먹고, 자는 게 전부가 아니었어?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무언가 큰일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곧 연령대별 추천 전집 목록을 펼쳤다. 실사 동식물, 오감 자극, 창작 그림책….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이 시기에 꼭 필요한 건 최소 다섯 세트예요.”

단번에 책값은 200만 원이 훌쩍 넘어갔다.

이어 패드 학습기도 소개했다.

책을 터치하자 성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화면 속 캐릭터가 말을 이어갔다.

“13개월 아이에게 화면을 보여줘도 괜찮을까요?”

“소리만 들어도 돼요. 오히려 언어 발달에 좋아요.”

그녀의 말은 매끄럽고 논리적이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책을 사야 할 것 같고, 패드학습을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밀려왔다. 이미 늦은 건 아닐까 하는 조급함,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 그리고 ‘정답이 뭘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뒤섞였다.

상담이 끝나고 그녀를 돌려보낸 뒤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남기고 간 자료를 꼼꼼히 읽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정말 다른 집 아이들은 저렇게 책을 읽는 걸까? 책 사는데 이렇게 많은 돈이 드는 건가? 우리 아이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비싼 책값 때문에 며칠을 망설이다가, 문득 중고 거래 사이트가 떠올랐다. 결혼 후엔 취미를 접으며 수영복, 발레복, 클래식 기타까지 팔았던 곳이었다.

검색창에 전집 이름을 입력하자 중고 책들이 줄줄이 떴다. 정가의 10분의 1, 20분의 1 가격에 올라온 걸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중고 거래 글을 뒤져가며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택배가 도착했고, 새로 들인 여섯 칸짜리 책장은 금세 가득 찼다. 그렇게 우리 집에 ‘가성비 책 육아’가 시작됐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매일 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다. 아이의 잠투정 시간은 독서시간으로 바뀌었다. 아이는 내 옆에 누워 “또, 또.”를 외치다 늦은 밤 스르르 잠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권씩 책을 읽었다. 어떤 날은 내가 먼저 잠들었고, 어떤 날은 내 목이 쉬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자 내 안에 묘한 성취감이 피어올랐다.

‘우리 애는 이렇게나 책을 많이 읽어요.’

누군가의 경험담을 부러워하던 마음이 어느새 자랑하고픈 마음으로 바뀌었다. 읽은 책을 일주일 치씩 방 한쪽에 쌓아두고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 하루 스무 권, 서른 권. 책 탑이 높아질수록 내 만족감도 함께 자랐다.

‘우리 아이도 책을 좋아하니, 앞으로 공부는 잘하겠지.’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아름답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책 탑이 높아질수록 아이의 “또” 소리가 줄어들었다. 좋아하는 책을 다시 내미는 아이의 손을 밀어내며, 나는 새 책을 꺼냈다.

“이건 아직 안 봤지?”

다양한 책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 책 탑을 더 높이 쌓고 싶은 욕심에 아이의 요청을 슬쩍 피했다.

아이는 그걸 느꼈다. 반짝이던 눈빛이 조금씩 식어갔다. 이젠 책을 내밀기보다,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그저 무심히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내가 쌓아 올린 건 책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아이에게 다시 반짝이는 눈을 찾아주고 싶어, 독서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공부머리 독서법》의 한 문장에 눈이 멈췄다.

“독서교육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라 재미, 많이 읽기보다 제대로 읽기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나는 그동안 ‘양’을 채우느라 ‘깊이’를 잃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잠자리 독서가 루틴이 되어갈 즈음, 둘째아이가 태어났다. 그 시간만큼은 남편이 갓난아이를 맡아 주었다. 덕분에 늘 사랑이 고팠던 아이도, 기록에 매달리던 나도 그 짧고 귀한 독서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반복해서 읽어주며, 진짜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는 학교에서 독서를 권장하며 나눠준 독서기록장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는다. 그런데 그 기록- 하루 네 권, 혹은 300쪽을 채우기 위해 의무적으로 읽기도 한다. 그 모습에서 예전의 내가 겹쳐 보였다. 책을 읽는 즐거움이, 기록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양보다 재미가 먼저야. 재미있으면 천천히 여러 번 읽어도 돼. 재미없으면 굳이 끝까지 읽지 않아도 괜찮아. 언제든 어려우면 엄마가 옆에서 같이 읽어줄게.”

그 말은 사실, 예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책을 사랑하게 만드는 건 ‘양’이 아니라는 걸, 실패를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요즘 나는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다.

짧게는 삼십 분, 길게는 한 시간. 그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작지만 분명한 연출도 곁들인다. 식탁 위에는 내가 읽을 책 한 권과 노트북, 그 옆에는 아이를 위한 동화책 두세 권을 놓아둔다. 아이들이 잠에서 막 깨어나는 소리가 들리면 일부러 못 들은 척 책장을 넘긴다. 그리고는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에 비로소 몸을 돌려 두 팔을 벌린다.

잠이 덜 깬 아이들의 눈에는 매일 아침 책을 읽는 엄마의 모습이 비친다. 나는 이제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책은 늘 곁에 있는 거야. 함께, 즐겁게 읽는 그 시간이 소중한 거야.

그 다정한 마음을 매일 조금씩, 나만의 방식으로 건넨다.


언젠가 책이 아이들 곁에서 힘이 되고,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곁에서 그 역할을 해주려 한다. 함께 책을 읽는 이 행복한 시간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먼저 깨어 조용히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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