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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 없을 땐, 비빔국수

“꼬인 오늘 하루, 다 풀어내라고”

by 사이 Mar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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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짜증이 나는 날이 있다.

하려던 일들은 뜻대로 되지 않고,

다짐했던 계획들은 흐트러지고,

연인과는 같은 문제로 또 다투고,

평소 같으면 웃어넘겼을 가족들의 말투에도 괜히 날이 서는 날.


오늘은 휴학 기간 동안 다닐 컴퓨터 학원 상담을 받으러 다녀왔다.

사진 찍는 것 중에서도 인물사진에 관심이 있어서

포토샵을 배워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기본적인 배경지식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무엇을 어디서부터 배워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상담을 예약했다.


첫 번째 학원은 간판부터 반짝반짝했다.

컬러풀한 로비, 바쁘게 타자를 치는 상담원들이 학원 맨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냥 엄청 학원 같았다. 학원이지만 가장 학원 같은..)

“상담예약하셨죠?”

능숙한 안내와 친절한 말투.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광 없는 흐린 눈빛.

마치 내가 무슨 질문을 할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와다다 쏟아지는 설명이었다.


두 번째 학원은 첫 번째 학원과 완전히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입구는 낡았고, 4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릴 때 ‘끼기긱…’ 소리가 나고 문이 닫힐 때는 ‘쾅!’ 소리를 내었다.

복도에 불도 꺼져있어서 운영 중인지 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음… 음…”

상담원은 대답하기 전마다 이렇게 뜸을 들였고

나는 건네받은 학원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있었다.


“여기엔 포토샵 과정이 안 들어있는 건가요?”

”네? 다 들어있죠. 기본이에요, 포토샵은.”

귀찮다는 듯 질문이 많아질수록  퉁명스러워지는 말투였다.

그래도 첫 번째 학원보단 인간적이어서 좋았다.


그러나 두 군데 모두 나에게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학원 일정이나 커리큘럼이 마음에 들면, 분위기나 시스템이 별로였고

새 컴퓨터와 탄탄한 강사진들이 있는 학원은 나와 시간이 안 맞았다.

야심 차게 휴학을 신청했는데 자꾸만 계획이 틀어지는 것 같아서 맥이 빠져간다.


두 학원의 위치가 서로 다르고 거리도 멀었는데,

하필 오늘 사람들도 많아서 앉아서 가는 일 없이 거의  목적지까지 서서 가야 했다.

하루종일 무거운 가방을 메고 버스를 타며 이동하니까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도 오늘 내게 운이 있긴 했는지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마지막 버스에서는 중간쯤 갔을 때 자리가 났다.

나는 빈자리로 터덜터덜 걸어가 앉았다.

창 밖을 바라보는데 스쳐 지나가는 간판들만 봐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늘은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 저무는 해의 빛을 느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입맛이 없으니 국수를 해 먹어야겠다

가만, 집에 소면이 남아있던가?


버스에 내려서부터 소면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계속 되짚어보면서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찬장을 열어봤는데 소면은 없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결국 다시 마트로 향했다.

걷다 보니 어제 엄마에게 짜증 냈던 게 떠올라,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엄마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내가 좀 예민했나 봐 “

사과하려고 했는데 엄마는,

”기분이 그렇다고 엄마한테 그러면 안 되지 “

또 내 속도 모르는 말만 했다. 그 말을 듣자 힘이 더 축- 빠지고 몸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마트에서 소면을 찾는데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소면 어디 있나요? “

”그 앞쪽이요. “

”죄송한데, 잘 못 찾겠어서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하.. “

마트 직원도 무뚝뚝했다.

이쯤 되니 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취방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가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이 정도도 못 견디는 약한 사람인가?’, ‘이런 일에 울면, 더 힘든 순간엔 어떻게 버티지?’

머릿속에서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들어왔다. 그 파도가 나를 휘감기 전에 다시 생각을 돌렸다.

‘집에 들어가면 계란 먼저 삶아야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계란을 집어 들고 주방으로 갔다. 냄비에 물을 가득 담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뒤, 레버를 돌렸다.


“띠리릭- 탁. “

”띠리릭- 탁. “


오늘도 자꾸만 불이 꺼졌다.

3년째 고장 난 버너.

집주인 분께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고쳐준단 말 이후 감감무소식이고,

 나는 여태까지 이 놈과 실랑이 중이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짜증이 난다.


물을 올려놓고 세수하고 돌아오니

기포가 올라오면서 물이 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냄비 안에 계란을 넣고, 양념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설탕 두 스푼, 식초 두 스푼, 고추장 두 스푼, 간장 두 스푼…)


다 익은 계란도 까고, 국수도 삶고, 양념장에 꼼꼼히 비볐다. 마무리로 통깨와 김가루,

그리고 지난주에 샌드위치하고 남은 청상추까지 올리니까 제법 그럴싸한 저녁식사가 완성되었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먼저 삶은 계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따뜻하고, 퍽퍽하고, 담백한 맛.

긴장했던 어깨가 그제야 스르르 풀렸다.

국수에 양념을 가득 묻혀, 호로록- 입 안으로 빨아들이니까 새콤달콤한 양념이 퍽퍽했던 입 안을 보드랍게 감쌌다.


그래, 입맛이 없을 땐 비빔국수지

아빠가 입맛 없을 때마다 엄마가 늘 해주셨던 것처럼.


엄마는 아빠가 입맛이 없으실 때마다 늘 비빔국수를 해주셨다. 마치 수고했다는 듯이. 그래서인지 비빔국수를 보면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수고했어. 오늘 하루 이리저리 꼬였어도 한 그릇 먹으면서 천천히 풀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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