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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옹지마 Aug 29. 2022

법이 갈라놓은 20년 사실혼의 노부부

오전 9시.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 한 분이 안내데스크로 오셨다.


안내데스크는 병원에서 내가 일하는 곳이다.


할머니는 지갑을 꺼내 뒤적거리더니 신분증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신분증을 받아 들고 확인해보니 할머니의 신분증이 아닌 1938년생 할아버지의 신분증이었다.


할머니는 “오늘 할아버지가 내과 진료가 있어요. 검사가 뭐가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라고 했다.


병원 기록을 조회해 '피검사'가 있다고 알려 드렸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채혈실로 향했다.


목요일은 일주일 동안 가장 바쁜 날이다.


목요일은 환자가 많기로 유명한 고관절과 허리 등을 보는 정형외과 000 교수와 신경외과 000 교수가 진료하는 날로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인 환자들이 진료를 위해 침대로 방문하기도 하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마련된 서른 대 가까운 휠체어가 동이 날 정도로 정말 많은 환자들이 방문하기 때문이다.


“쏴아.”하고 무섭게 쏟아졌던 소나기처럼 안내데스크를 방문한 수많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12시가 돼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춘 소나기처럼 잠잠해졌다.


잠깐의 짬을 이용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미간이 찡그려졌다.


‘아하.’ 오전 9시에 신분증을 내밀며 할아버지의 검사가 뭐가 있는지 물었던 할머니였다.


“뭐 도와드릴까요?”


“다른 게 아니고, 뭐 좀 물어보려고 병원에 전화하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서 늙은이가 어렵네요. 


혹시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전화번호가 없을까요?”


“여기가 고객지원팀이에요. 제가 여기 전화번호 적어드릴 테니 궁금한 거 있으시면 편하게 전화하세요.”


혹시나 안보이실까 하는 마음에 메모지에 커다랗게 전화번호를 적어드렸다.


메모지를 받아 든 할머니는 반으로 접어서 지갑 속에 고이 넣었다.


가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나를 3초 정도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슬픈 표정으로 말을 하셨다.


“내과 간호사가 남편이 언제 진료가 있는지 알려주지 않아요.”


의아해하며 “왜요?”라고 물었다.


“혼인 관계가 아니라고 알려주지 않아요.”


무슨 소리지? 또 한 번 미간이 찡그려졌다. 남편이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니 할머니는 말을 이어나갔다.


“남편을 내 나이 예순일곱에 만나서 20년을 같이 살았어요. 나이 들어 만났으니 굳이 혼인신고를 할 필요도, 할 생각도 안 했죠. 그러다 3개월 하고 5일 전에 몸이 안 좋아져 남편 자식들이 요양병원에 입원시켰어요. 그 후로 남편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요.”


“요양병원에 직접 가시면 되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머니는 요양병원을 여러 번 찾아갔지만 남편 쪽 자식들이 만나지 못하게 요양병원 측에 조치를 해놓았다고 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도 할머니의 전화번호가 뜨면 통화를 못하게 막았다고도 했다.


다른 사람 전화로 전화를 해서 간신히 통화를 했고 그렇게 해서 오늘 진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채혈실에서 12시가 다 되도록 기다려도 할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병원에 오지를 않았는지, 길이 엇갈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내과 진료를 봤는지 간호사에게 물어도 혼인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20년을 같이 살았는데 3개월을 넘게 얼굴을 보지 못해 너무 그립고 보고 싶다고 했다.


문득, 갑자기 할아버지 건강이 나빠지면서 재산 문제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20년을 살았으면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사실혼 관계이기 때문이다.


“혹시 재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남편 재산에 관심이 없어요. 제 나이도 여든다섯인데 저도 집도 있고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을 재산이 있어요. 제 자식들도 다 잘 살고 있고요.”


"그냥 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남편을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좋겠어요."


이 말은 하는 할머니의 두 눈에는 눈물이 차 오르고 있었다.


“혹시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그 있잖아요. 노인들이 어린이집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고 시간 때우는 곳”


"아~ 주간보호센터 말씀하신 거예요?"


그렇게 두 분은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만났다고 했다. 


할머니는 평소 친구가 없어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주간보호센터를 찾게 되었다.


오전 시간을 보내고 12시가 되자 점심을 먹기 위해 공동 탁자에 십여 명의 노인들이 모였다. 


노인들 중 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할아버지는 큰 대접에 밥과 반찬들을 모두 쓸어 담고 비비고 있었다. 


가시가 있는 생선까지 통째로 넣고 말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할머니는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물었다. 


“제가 당뇨가 심해서 합병증으로 눈이 잘 보이지가 않아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의 딱한 처지를 돕고 싶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할머니는 그릇에서 생선을 꺼내 가시를 발라줬다.


이날 이후로 할머니는 계속해서 할아버지의 점심을 챙겼고, 할머니 덕분에 할아버지는 식사다운 식사를 하게 됐다.


그렇게 며칠 동안 점심을 챙겨주면서 지켜본 할아버지는 늘 남루한 한 가지 옷만 입고 왔으며, 그마저 옷소매는 때가 찌들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딸에게 전화를 했다.


"미숙아, 엄마다. 미안하지만 남자 내복 하나만 사다 줄 수 있니?"


"남자 내복은 뭐하시게요?"


"어, 엄마가 다니는 주간보호센터가 있는데 불쌍한 할아버지 한 분 계셔, 내복이 너무 더러워서 말이야."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내복을 선물했다.


내복을 선물 받은 할아버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실은 집에 자식들이 사다준 내복이 여러 개가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 만날 입던 옷만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실제로 할아버지의 집에는 뜯지도 않은 내복뿐만 아니라 속옷과 옷들이 방 한 켠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알게 모르게 그렇게 정이 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초라한 행색에도 같은 연령대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말투도 굉장히 점잖았고, 손글씨도 정말 멋졌다. 


“공부 좀 하신 거 같은데 할아버지는 학교를 어디까지 나왔어요?”


할아버지의 대답에 할머니는 "오, 정말요?"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맞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세대는 먹고사는 게 가장 큰 문제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교문조차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할머니 자신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밖에 나오지 못했는데, 대학교까지 다녔다니...


할아버지에게서 풍기는 낯섦이 여기에 있었던 거라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딱한 처지와는 반대로 할아버지의 남다른 배움이 할머니의 마음을 할아버지에게로 향하게 한 것이다.


자식들이 집에 자주 들르냐는 질문에 잘 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청소와 빨래는 언제 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을 정도로 오래됐다고 했다. 


실제로 할아버지의 집에는 자식들이 사다 놓은 뜯지도 않은 옷들이 방 한 구석에 쌓여 있었다.


집은 청소를 언제 했는지 먼지도 뽀얗게 쌓여 있었다.


할머니는 팔을 걷어붙이고 거실과 방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누런 떼가 있는 내복은 물론, 속옷과 양말 점퍼까지 빨래를 했다.


일주일에 여섯 날을 할아버지 집에 머물며 청소도 하고 밥도 지어 함께 나누며 그렇게 할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시간을 보낸 세월이 20년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루는 할머니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3개월하고 5일 전에 병세가 나빠진 할아버지는 자식들의 손에 요양병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20년이란 세월 동안 할아버지의 자식들을 단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로 인정받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해보지는 않았아요. 


그러나 사람인지라 조금은 속상하긴 하더라고요. 뭐 그래도 할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살았으니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아요."


길다면 긴 20년의 세월을 부부라고 해도 어느 하나 이상하지 않을 그 두 분의 인생.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죽기 전에 얼굴 단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여한이 없다고 했다.


"자식들이 '엄마는 속도 없냐며 그만 잊으라'라고 했지만 어찌 사람의 마음이 말처럼 되나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안타까웠다.


할머니는 어디에서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그리고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보행보조기에 몸을 기대어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개인정보호법으로 할아버지의 진료일을 알려 줄 수 없는 세상의 법이 너무나 야속했다. 


그렇게 2주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을 때 안내데스크의 전화벨이 울렸다.


와상환자가 외래 진료를 봐야 하는데 침대를 빌려달라는 전화였다.


오셔서 말씀하시면 바로 준비해주겠노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요양병원 침대에 누운 채 실려 병원 로비 출입구를 통해 안내데스크로 다가왔다.


환자 옆에는 가족들로 보이는 보호자 두 명이 있었다. 


조금 전에 전화를 건 사람이었다.


응급실에서 침대를 가져다 병원 침대로 옮기는 것을 돕고 다시 자리를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어 왼쪽을 바라보니 병원 로비 왼쪽 기둥에 몸을 숨기고 침대에 실려 외래 진료실로 가는 그 환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가 부둥켜안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십 미터의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누워있는 침대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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