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팔자 극복하기

뭘 좀 해보려고 하면 아픈 나에게 

by Claire mindfulness Mar 14. 2025


어릴 적 조용히 욕심이 많았던 내가 성인이 되어 인생 뭐 있냐 편하게 살자 주의가 된 데에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20세 초반 앓았던 아토피 피부염 때문이다. 




나는 꾸준히 성실한 타입의 학생은 결코 아니었지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는 누구보다 나를 갈아 최선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입시 스트레스의 여파로 두 번째 수능 즈음에 아토피 피부염 증상이 피크였고 수능을 며칠 남기지 않은 어떤 날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감사하게도 기대했던 것 이상의 수능 성적이 나오고 내가 평상시 상상도 해보지 않은 좋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증상은 점차 좋아졌는데 두 번째 수능을 본 직후 그때 내 인생을 결정짓는 인생관이 형성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가진 것에 비하여 큰 복을 받았고, 스트레스는 건강에 좋지 않음을 뼈저리게 알았으니, 욕심내며 살지 말고 무조건 편하게 살자는 인생관이다. 그때부터 나는 웬만한 것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할 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렇게 파도에 나를 맡기듯 운명에 나를 맡기며 살았다.       


내가 가지고 싶은 목표를 세우지도 않았고, 그러므로 죽어라 노력하는 일은 없었고, 그냥 운명이 나를 안내하는 대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려니 정당화하면서. 

나를 조금이라도 더 힘들게 할 위험요소가 있는 선택들을 피해 가면서. 


운명의 장난이 흥미로운 것이 그렇게 살다 보니 20년이 지나고 중증 아토피 피부염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있었다. 내가 많이 힘들어하며 팔과 다리의 딱지를 가만히 두지도 못하고 떼어내지도 못하던 그때에, 우리 엄마는 나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병원에 가면 스테로이드를 쓴다면서 한의원에 데리고 갔다. 의대생이 되어 아토피 피부염에 대해 배우면서, 그리고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문득문득 엄마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내가 힘들어하던 그때가 이미 2000년 전후였는데 교과서적인 치료로 스테로이드 로션을 썼더라면 내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사이에 중증 아토피 피부염의 치료는 획기적으로 발전하였고, 중증도에 따라서 스테로이드 로션 이외에도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효과를 지닌 다양한 생물학적 제제들이 쓰이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어렵고 힘든 것을 회피하고 살아온 삶에 부끄러운 마음과 후회가 조금씩 자리 잡은 것은 30대 후반~40대 초 즈음이었다. 

치열하게 살지 못한 결과로 내가 이룬 것이 너무 없는 듯한 기분에 초라했다. 

내 소속과 지위라는 껍데기를 벗기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벌거벗은 내가 있었다. 

앞으로 당당하게 먹고살려면 뭔가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이것저것에 닥치는 대로 매달렸다. 

그렇게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보려는 순간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유전적인 소인이 있는 것은 학생 때 이미 알고 있었는데 증상이 처음 나타난 것은 만 40세가 되는 해였다. 강직성 척추염 역시 아토피 피부염과 같이 뿌리를 뽑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평생에 걸쳐 염증을 잘 조절하면서 지내야 하는 병이다. 따라서 스트레스와 과로는 금물이다. 

TNF-alpha blocker를 써야 할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고 소염제로 잘 조절되는 정도이지만, 잊고 살다가도 내가 한 번 열심히 살아볼까, 하는 순간 고개를 들어 찾아온다.  


나는 팔자가 치열하게 살면 안 되는 팔자인가? 

덕분에 욕심도 버리고 용기도 내지 않고 그렇게 살았는데, 앞으로도 그래야 하나?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지레 포기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아토피 피부염이나 강직성 척추염을 핑계로 내가 가고 싶은 길의 목적지를 바꾸지는 않으려고 한다. 

대신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가는 법을 익히려고 한다. 

중간에 너무 힘들면 다시 돌아올지언정 미리 걱정하며 출발도 안 하지는 않겠다.  


철없이 trial and error를 하고 있을 나이는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항상 가장 좋은 몫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