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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zi Oct 20. 2023

21.01.11 오늘의 풀무질

우물 바닥까지 닥닥 긁고 있다.

우물 바닥까지 닥닥 긁고 있다.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듯 꼭꼭 비틀어 돌린다. 채우는 데에만 골몰해있었던 시간들은 잠시 뒤로. 내 생에 이토록 뭔가를 미친듯이 만들어본 적이 있을까. 여유 속에서 퍼내는 거야 쉽다. 이야기는 시간이 채워준다. 하지만 가장 밑에 깔려있는 농축된 무언가까지 퍼내려면 끝없이 파고 내려가야 한다. 나는 일단 다 퍼내기로 했다. 퍼내고 퍼내서 바닥에 눌어붙은 찐득한걸 마주하기로 했다. 얼마나 퍼냈다고 벌써 바닥이 드러나고 있다. 퍼내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서점이 있으려면 책이 있어야 하고, 글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요즘 책 한권은 만원에서 이 만원대, 대충 공급가가 저렴한 건 65-75프로, 비싼건 8-90프로.요즘 책은 있는 그대로 팔 수가 없다. 동네책방이라 억지로 정가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할인에 관한 문의는 계속 들어온다. 정가는 정가가 아니다. 교보와 알라딘이 형성한 시장가가 정가다. 10프로 할인에 5프로 적립. 배송비는 무료. 거대 기업들이라 할인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소비자에게는 85프로의 정가가 책의 가치로 각인될테다. 책을 꾸미는 사람도, 책을 쓰는 사람도, 책을 운반하는 사람도 모두 15프로만큼씩 깎여나간다.


책과 글의 가치를 이걸로 다 설명할 순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올리면서 내가 지금 팔고 있는 것들의 무게를 손끝으로 느낀다. 소비의 사회는 생산과 소비를 분리한다. 생산자는 생산한 것 외의 모든 것을 소비한다. 자기가 생산한 가치들은 자신을 위해 소비될 수 없다. 모두 알수없는 누군가의 생산을 욕망하고, 소모한다. 나는 글의 생산자가 되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찍어내고 또 찍어내며 내가 파는 것들의 가치를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합리적인 소비자로서 내가 소비하는 것들의 가치를 정당하고 정확하게 측정하고자 했다. 나의 노동력이 가진 생산성을 재보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무얼 팔고 있는건지 혼란스럽다.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옮겨가고 나서야, 향유를 고민한다. 글을 쓰기 위해 비슷한 글들을 많이 찾았다. 글모임에도 들어갔다. 다른 글들을 교환하며 삶에서 글이 필요한 이유들을 관찰했다. 아직 다 쓰지 못한 글들을 모아두기 시작했다. 읽고 고치며 나를 바라보고, 어제를 되새기고, 오늘을 배운다. 이건 내가 생각하던 생산과 소비의 매커니즘이 아니야. 미처 생산이 끝나기도 전에 진행되는 소비는 들어본 바 없다. 모든 소비는 생산이 끝난 완제품으로 이루어진다. 가치가 생산되면 닳고 해져 없어질 때까지 소비하는 게 공식이다. 힘껏 글을 쓴다는 게 이런거구나, 그간 숱한 글을 써오면서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생겼다. 그간은 책조차도 상품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애써 수긍해왔다면, 이제서야 책이 왜 상품이 아닌지에 눈길이 간다.


많은 사람들이 동네서점은 지역 커뮤니티와 로컬문화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좋은 말이지만 낡았다고 치부했다. 자본주의를 이길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책을 상품으로 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 지키는거지, 꼭 지켜야하는 그 잘난 '대의'나 '정당성'은 사실 모르겠다고 한 발 빼왔다. 여러 사람들의 글과, 글이 아직 되기 전과, 글의 반응들을 읽었다. 어느새 누군가에게 향유될만한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풀무질에서의 경험들이 두고두고 읽힐만한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시간들이 생산에 그치지 않고 창작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서로의 시간이 얽히고 섥히며 꽤 튼튼한 버팀목이 된다. 우리가 가진 만여 권의 책들도 똑같이 향유되길 바란다. 누군가가 뽑아 가는 그 책이 그 이에게 버팀목이 되길 바란다. 수많은 책 속에서 조용히 책을 살피고, 책을 좋아하는 또 다른 사람의 따뜻함을 느끼는 풀무질에서의 경험이 그 삶 깊숙이 침투되길 바란다. 내가 글을 쓰는 시간처럼, 소비의 매커니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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