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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긋 Oct 27. 2024

DELETE

원망, 달, 포옹, 소진, 불꽃

때때로 향초를 피운다.

큼직한 유리잔에 튼튼한 스테인리스 뚜껑도 달렸다.

불을 붙인 기억이 많진 않은데 벌써 불꽃이 꽤 가라앉았다.

겉에 붙은 라벨에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라벨 끝에는 ‘DELETE’가 혼자만 다른 모양으로 새겨졌다.

친구가 새겨줬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시간이 버겁다.

나를 잘 아는 내 친구는 본인에게 필요한 걸 내게 선물했다.

선물을 받은 날 눈물을 흘리며

친구 대신 선물을 껴안았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숨 돌릴 틈 없이 떠드느라

나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려도 충분하다.

누군가 내 서툰 장난을 발견하면

나는 쏜살같이 그에게로 가서 껴안아 버릴 테다.

내 얼굴을 그의 뺨에 딱 붙이고 움직이지 않을 거다.

힘이 잔뜩 들어간 팔과 긴장으로 요동치는 심장의 파동으로

이미 어깨 너머로 넘어간 내 표정을 상상할 뿐인 그는

가만히 내 등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나는 교묘하게 그를 사랑할 거다.

내게 왜 말을 시키느냐고, 대체 무얼 기대하느냐고

조금은 뒤틀린 마음을 곱씹으면서

자칫 숨통을 조일지도 모르는

어떤 힘을 불안해하며

 

세상에 이유가 없는 건 없다는 말에

그러니까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은 없다는 중얼거림에

있는 힘껏 불을 피울 때가 있었다.

 

얼추 다 타버린 말을 힘껏 껴안고

다들 그렇게 이유가 있고 설명할 수 있는데

왜 다 이유가 있어야만 하냐고

이유가 없어야 할 이유는 뭐길래

그렇다면 내게 달린 이유는 무엇이며

그냥, 그냥으로 족하진 않은지

사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다가도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일이 어찌나 많은지

 

혼자 주절대는 사이 향초의 불꽃은

파라핀이나 슬쩍 녹일 뿐이지 아무것도 태우지 못하고

그저 조금 가라앉았다.

 

무엇 때문인지 지쳐버린 냄새가

너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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