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인천 개항장이란 곳이다. 인천 차이나타운 옆 일본풍의 건물이 매력적인 거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어떻게 보면 조금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유동인구는 너무나 적다. 어떤 날은 지나가는 사람을 손에 꼽을 만큼만 볼 수 있다. 자주 지나가시는 분들은 얼굴을 외울 정도다. 도대체 왜 이런 장소에서 카페를 4년 넘게 운영하고 있냐는 의구심이 들만 하다. 솔직히 이 가게는 카페 운영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내의 공방 자리였다.
나는 19살 때부터 작은 가게의 주인장이 되는 게 꿈이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소박한 꿈이었지만 그것이 내 꿈이었다.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넌 서비스업에 특화된 얼굴이야!”
맞다. 나는 서비스업에 참 적합한 인물이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절대 나의 주장이 강하지 않고 타인의 말은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리는 능력이 있다. 상대방의 말을 참 잘 들어준다. 그러다가 가끔 뜬금없는 천재 같은 조언도 간간이 날린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는 말도 참 많이 듣는다. 친척 형과 너무 똑같다는 말도 듣고 친구, 동생, 삼촌, 심지어는 아빠와 닮았다는 말도 듣는다. 전혀 경계심이 들지 않는 어디서 한 번쯤 만난 것만 같은 친근한 얼굴은 엄청난 무기다. 성격은 둥글둥글하며 지나치지 않은 사교성은 상대방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치명적인 단점일 수 있는 이 장점은 서비스업에 재격이었다.
하지만 이 장점을 한 번도 나를 위해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어찌 보면 남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은 호구되기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40대에 들어설 무렵 이런 단점 아닌 장점 때문에 친구에게 큰돈을 떼인 적이 있다. 그것도 결혼하고 갓 1년을 넘길 무렵이었기에 타격은 컸다. 넉넉지 않은 돈으로 신혼살림을 꾸렸기에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하다. 그 일 때문에 2년 동안 돈을 되돌려 받기 위해 그 친구를 쫓아다녔고, 내 탓으로 인한 이 일말의 사건으로 아내와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갔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장면이 있다. 짐을 풀지도 못하는 좁은 단칸방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나는 모태신앙이었지만 그 기도는 40세에 처음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하는 간절한 부탁의 기도였다.
결국 돈은 한 푼 받지 못했고 점점 밀려드는 생활비의 압박에 팔자에도 없는 공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40세로 접어든 첫 해부터 내 꿈을 잊어버린 채 생활비 버는 기계로 전락하여 하루하루를 좀비처럼 보냈다.
그렇게 6년 동안 주야로 공장생활을 하다 보니 금전적인 문제는 조금씩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아내의 역할이 컸다. 웹디자이너였던 아내는 돈 되는 일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하였다. 다행히 우리 부부의 골도 점점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 같았다.
2018년 크리스마스이브, 그날도 어김없이 우리 가족은 동인천에 있었다. 동인천에는 신포동이란 곳이 있다. 이곳은 나의 젊은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네이다. 20대 시절 인천에서 신포동은 요즘 말로 정말 핫한 동네였다.
그 시절 이곳은 옷가게, 술집, 커피숖이 빼곡했고 음악과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동네였다. 아내도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기에 우리 부부는 쉬는 날이면 항상 이곳에 와서 추억을 공유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우리는 발길을 멈추었다.
너무나도 작고 예쁜 가게다.
그 무렵 아내는 공방을 운영하고 싶어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가게와 무언가 연결되는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직장을 옮길 무렵이라 나에게는 작지만 퇴직금이란 게 있었다. 나도 아내에게 한 번쯤은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 나 때문에 고생한 아내를 위해서……
가게 창문에는 조그마하게 무언가 써 붙어있었다.
"임대문의"
쓰여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저……가게를 한번 보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