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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랑 Aug 10. 2024

똑똑. 실명위기인데요. 수술 가능한가요?

'더 큰' 병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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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항에서 출발해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집 근처 안과로 달려갔다. 엄마아빠가 평소에 진료받으러 다니시는 작은 동네 안과였다. 의사 선생님께 어제 태국 병원에서 받아온 진단서와 망막 스캔 자료를 보여드렸다.


열공성 망막박리 스캔 예시. 출처: Courtesy Mrinali Patel Gupta, M.D., Weill Cornell Medical College, New York

망막박리 진단을 받고 바로 귀국했다는 말에 그는 심각한 얼굴로 자료를 받아 들더니 한 장 한 장 꼼꼼히 넘겨 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지응급상황이 맞고, 2차 병원에 가서 진료를 다시 받겠지만, 아마 수술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수술이 가능한 협력 병원에 최대한 빨리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의뢰를 해주겠다고 했다. 말에 한국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곧바로 두 병원에 연락을 취했다. 먼저 집에서 가까운 안과전문병원에 전화를 걸었는데 아예 연락이 닿지 않았다. 두 번째로 연락을 시도한 곳은 서울에 있는 대형 안과전문병원이었고, 다행스럽게도 같은 날 오후에 바로 진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 병원이 '더 병원'이라고 설명하며  안심시켰다. 나는 더 큰 병원이 왜 좋은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저 병원 중 한 곳이라도 연락이 닿은 것에 감사했고, 심지어 병원이라는 말에 마음이 놓였을 뿐이었다. 우리는 희망에 부풀어 곧장 서울로 향했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해맑게 웃으며 엄빠와 셀카를 찍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줄도 모르고.


도착한 서울의 안과전문병원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평범한 수요일에 눈이 불편해 병원을 찾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당장 24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 속에서 그려본 적도 없는 광경이었다. 내게 눈은 그냥 그 자리에서 당연하게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해내는 기관이었지, 까다롭게 구는 치아나 허리처럼 신경 써서 돌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못살게 굴었다. 하루종일 모니터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마구 비벼대고, 렌즈를 착용한 채 수영을 하고, 강한 방콕 햇볕 아래 선글라스도 끼지 않고 대낮에 산책을 다니면서 말이다.


환자와 보호자들로 정신없이 북적거리는 대기실에서 약 두 시간 동안 기다림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불려 다니며 차가운 기계 앞에 앉아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긴장되고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병원 전체를 차갑게 비추는 시퍼런 형광등 조명 때문만이 아니었다. 병원에 들어선 이후 마주친 수많은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쌀쌀맞고 날카롭게, 조금의 뜸 들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환자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끊임없이 실려오는 짐짝들을 최대한 빨리 치워버리려는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태국에서처럼 넘치는 인내심으로 환자들을 대하는 따뜻한 선생님들은 여기에 없었다.

저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겠지..


만약 전공의 파업 여파로 이 병원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환자를 소화하고 있는 거라저분들도 힘든 상황이겠지 싶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을 내려놓으려 애썼다. 이제 드디어 의사 선생님과의 진료만을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내 이름을 부를 순간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조리 있게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지금 관건은 한국에서 수술을 빨리 받을 수 있는가였다.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잠시 후, 드디어 이름이 불렸다. 나는 '바쁜 당신들의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비굴한 종종걸음으로 진료실로 향했다. 마치 백 걸음처럼 느껴지는 열 걸음이었다. 나는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으려 애썼다. 달달 외운 말들을 머릿속으로 다시금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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