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만의 출근
앞서 밝혔다시피 실업기간 약 3개월 만에 첫 출근을 했다.
첫 출근이니 만큼 출근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해서 담당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 오분이 지나자 휴대폰에 미리 전달받은 담당자의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에스코트 나온 직원은 장차 함께 일하게 될 팀장이었다. 나처럼 작은 키에 오십 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오피스룩보다는 좀 더 화려한 차림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오른쪽 가슴께에는 큐빅으로 된 큼지막한 샤넬 로고의 브로치가 붙어 있었고, 밝은 갈색으로 염색된 긴 머리는 등의 삼분의 이를 덮고 있었으며, 아침부터 공들여 세팅한 '공주님 웨이브'는 내가 기존에 봐 오던 '일하는 여성'의 흔히 말하는 오피스 룩과는 멀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에스테틱 원장님이나 네일숍 사장님 아니면 미용실 원장님이라고 하면 더 그럴듯할 것 같았다.
서둘러 나를 데리러 나오느라 그랬는지 가뿐 숨을 숨기지 않고 나를 안내하는 그녀는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건물 계단과 몇 개의 출구를 드나들더니 건물 어딘가에 숨어 있는 사무실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사무실 벽 한쪽에 마주 보고 있는 책상 두 개가 있고 반대편 벽 쪽에는 정수기 한 대, 간이 옷걸이, 작은 냉장고 한 대, 복사기가 놓여 있었다. 푸른색 카펫이 깔려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깨끗하거나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창문 없는 사무실'. 사무실의 전체적인 인상은 임시로 거처로 급조된 세트장 같기도 하고, 연극 무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출입문과 마주 보는 벽 한쪽에는 대여섯 개의 의자만이 일렬로 줄지어 있었는데, 팀장은 그 가운데 의자 중 하나를 빼서 나에게 앉게 한 다음 차를 권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텅 비어 있는 사무실 한가운데 앉아 있으니 역할 없는 연극배우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미로 같은 건물 내부를 거쳐 나를 데리고 온 것이 힘에 부쳤는지 팀장은 숨을 몰아 쉬었다.
시계가 9시를 가리키자 내 전임자인 이십 대 후반의 여직원이 출근했다. 내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출근과 동시에 자리에 앉아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팀장도 거울을 꺼내 얼굴을 보고 립스틱을 덧바르는 등 양쪽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본격적으로 외모 체크가 시작되었다.
'이런 분위기에도 익숙해져야 하는구나...'
내심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둘이 나게에 번갈아 가져다주는 업무 인수인계 자료를 받아 읽어 나갔다. 모르면 언제든지 질문하라는 말을 하고 둘은 아침에 해야 할 화장을 비롯한 일에 집중했다. 바쁘지는 않았지만, 뭔가 빠진 느낌, 부적절하게 부산한 느낌. 창문 없는 답답한 사무실 안에서 둘은 착실한 햄스터들처럼 나름 자기들만의 쳇바퀴를 잘 굴리고 있었다.
'나만 이상한 사람인가?' 사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무언가 모를 답답함을 느꼈지만, 전혀 바깥을 볼 수 없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A4 100장쯤 되는 무성의한 프린트 물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앉을 책상도 없는 사무실에서 의자 한 개를 내 앞으로 가져와 책상처럼 프린트 물을 올려놓고 사용했다.
간이 책상이라도 드리고 싶어 신청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답변이 없다는 말만 두세 번 되풀이하던 팀장은 오후가 되자 책상은 아예 잊어버린 듯했다. 이따금 내가 질문을 던지면 질문을 받아 설명해 주고, 체계 없이 즉문즉답 하며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정도의 단편적인 대화는 거듭될수록 '이게 맞나, 나는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을 하긴 하였으나 그런 잡념에 지나지 않는 생각이 커지기 전에 스스로 잡도리를 하려고 애썼다.
'할 수 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점심 식사는 팀장으로부터 '나'라는 바턴을 이어받은 전임자 k의 안내로 구내식당으로 가서 맛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한식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단체 급식을 먹었다. k는 내가 업무에 관해 몇 가지를 물어보자 바로바로 답을 해주면서도 그동안 힘들고 불만이었던 부분들도 설핏 내보였는데 내 반응을 봐가며 수위 조절을 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나는 끈기 있게 잘 들어주었다. 사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느끼고 있어 지만, 그녀가 말해주어 조금 더 놀랐던 것은 나의 롤은 의외로 '멀티플레이어'에 가까운 반면 사무실내 유일한 동료이자 상사인 팀장의 롤은 단순하고 꽤나 명확하고 단순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매우 부당하고,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전문적인 일을 할당받은 팀장의 롤은 현재 부재했다. 물론 그것이 팀장의 잘못은 아니었으므로 팀장을 탓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면 다른 역할이라도 나누어 함께 했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팀장은 자기 일 조차도 k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하나 마무리 짓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k가 말하지 않아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사무실의 청소부터 아주 사소한 것 하나하나 까지 k가 관리(말이 좋아 관리지, 그냥 일이란 일은 죄다 하는 역할)하고 신경 써야만 하는 시스템이었다.
한 마디로 이 사무실은 보스와 말단 비서 두 사람의 오피스였던 것이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역할은 이런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퇴근까지는 제대로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오후에는 회사 시스템에도 접속해 보고 매뉴얼도 익혀보았다. 앞으로 내가 써야 할 보고서 폴더도 비번을 받아서 들어가 둘러보았다.
보고서를 보고 있는 와중에도 팀장은 나를 불러 액셀 파일 몇 가지를 수정해달라고 했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메일을 보내야 하니 보고서를 캡처해서 메신저로 보내주면 자기가 본사와 고객사에 보고용 메일을 쓰겠다고 했다. 오피스 프로그램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백 번 양보해서 자신이 보내야 할 보고서를 써주면 캡처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캡처를 해서 메신저로 보내주니 요구 사항 몇 가지를 덧붙여 다시 캡처해서 토스 해달라고 한다. 도대체 이 사람은 자기에게 부여 된 딱 한가지 역할 외에는 전혀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구나 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군말없이 요구 사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여긴 아닌 것 같다.'
출근 시간은 서두르면 1시간 10분, 퇴근 시간은 1시간 20분 거리. 2개월 수습 기간에 4대 보험을 떼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 그렇게 다 양보 하고서도 여기를 다녀야 한다면 그 이유는?
퇴근을 하고 집으로 와서 딱딱한 로퍼에서 발을 빼내는데 입안에 쓴맛이 느껴졌다. 속은 기분도 들고, 착잡한 기분 때문에 잠을 이룰 것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