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며칠 전 새벽이었다. 심장을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끈 중 하나가 "툭"하고 끊어지는 걸 느꼈다. 모로 누운 베개 한쪽에 얼굴이 눌리는 걸 느꼈지만 세계와 나는 분리되었다. 뒤이어 묵직한 두려움이 서서히 밀고 들어왔지만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세계와 내가 분리된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진공 포장 된 닭가슴살처럼 진공 상태에 있으니 뾰족하게 생긴 두려움과 불안들로부터 보호받는 기분도 들었다. 차라리 이 고립감이 안온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아무도 나를 찾지 않기를 바랐다. 한동안을 그럴 터였지만, 그 마저도 얼마가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피곤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이어졌다. 옅게 든 잠은 분절된 꿈과 파편적인 기억들을 마구 흩뿌려 놓았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새벽 한 시에서 세시 사이였다. '불안'이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과의 동거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불편한 손님 불안.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싶지 않았지만 서서히 한계가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몇 년 간 끊었던 우울증 약을 다시 먹어야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첫 출근을 한 이후 마음이 더욱 무겁고 복잡했다. 머릿속에서는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나 자신을 책망하고 비난하는 셀프 악플들이 순식간에 주르륵 달렸다. 내 마음은 내 편이 아닌가?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자신을 책망하지? 회사가 나를 평가하듯 나 역시 이 회사가 다닐만한 회사인지 아닌지 재보고 평가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덤비듯 불쑥 튀어나왔다. 생각은 많았지만 그 어떤 생각도 여전히 '실업자' 신세인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으므로 또다시 마음이 저 아래로 가라앉는 것만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간식을 달라 보채는 고양이들의 원성을 달래주려고 간식통을 열어 동결건조 된 닭가슴살 트릿을 고양이 전용 그릇에 담아 손으로 쪼개 주었다. 바스락바스락 작은 쌀알 같은 치아로 야무지게 간식을 씹는 소리만이 내가 아직 이 공간에 남아 숨 쉬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한 때, 서울의 여느 뒷골목 이름 없는 길고양이의 새끼로 태어나 나를 만나게 되었던 두 마리의 가엾은 생명들은 오로지 나를 의지하고, 나로 인해 살아간다. 그들로 인해 나 역시 살게 되었고, 좀 더 잘 살아낼 의지를 키우기도 한다. 그러니 그들을 키우면서 나도 키워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키우며 살아왔는데, 나는 불쑥불쑥 화가 났고, 더러는 절망하기도 했다. 퇴직 후 나는 부지런했지만 무능력했고, 그런 내가 어떤 존재들에게 유익할 수 있을지 늘 조마조마했기 때문에 '절망'은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사는 것에 겁먹지 않으려고 나는 가끔 웃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가짜 웃음이라도 웃을 때마다 '잘 안 풀리는 내 인생'을 까먹게 되기도 했다. 까먹고 나니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많은 기억들을 내가 일일이 너무 잘 기억하려고 애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쁜 기억들을 굳이 되풀이하면서 스스로에게 어떤 벌을 주려고 했던 걸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벌을 받는 것도, 용기나 격려를 얻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으면 된다.(지금으로서는 이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비록, 퇴직 후 제대로 된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커서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이렇게 멀쩡히 잘 살아 있으니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싶다. (솔직히 이젠 더 짜낼 힘도 없는데 호호)
나는 출근 첫 날 저녁 9시쯤 메일로 회사 인사팀에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겠다는 이유와 내용을 간단히 작성해 메일로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메일로만 보내는 게 예의는 아니다 싶어 인사팀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으나, 오전 7시 반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랬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문자 메시지로 다시 메일의 내용과 같은 이유로 더 이상 출근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써서 보냈다.
메일을 보내고 다음 날 아르바이트 지원을 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 몇 개월 간 그 곳에서 일을 할 예정이다. (딱, 죽지 않을만큼만 살려 주시는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