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잠이 오지 않는다. 낮에 있었던 일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현우 씨의 의식이 깨어난 것과도 같다니... 낮에 젊은 엔지니어로 보이는 사람이 이야기하기로 남편의 기억을 이식하고, 그걸 학습하면 남편처럼 생각하고 말한다고, 아니 사고 전의 남편과 똑같을 거라고 했는데 진짜 그게 가능할까?
요즘의 AI기술이라는 것이 사람과 구분이 안될 정도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건 그냥 기계 아니,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잖아. 현우 씨처럼 말을 한다고 해도 너무 이상할 것 같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
의사 선생님은 괜히 이런 일을 만들어서 왜 머리 아프게.... 아냐, 그래도 좋은 소식이라고 하고 말한 걸로 보면... 도움을 주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봤던 영화에서 본 것 같기도 해. 조니 뎁이었나? 그래... 조니 뎁이었을 거야. 보면서도 참 이해가 안 됐었는데 지금 갑자기 생각나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기억을 이식한다고 쳐도, 현우 씨처럼 생각하는 기계라니.. 무서워...
참 내...조니 뎁도 70이 넘은 할아버지네...
민서는 그렇게 뒤척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지현우 씨 보호자님?" 담당 간호사가 찾아왔다.
"아...네?"
"선생님께서 진료실에서 잠시 뵙자고 하네요. 20분 뒤에 진료실로 가보시겠어요?"
"무슨 일... 아... 알겠습니다. 갈게요."
아마도 어제 일 때문에 따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제는 소울뎁인가? 아무튼 그 회사 사람들이 몰아치듯이 이야기해서 정신이 없었으니, 정신 차리고 똑바로 들어봐야지! 그렇게 다짐하고는 남편 얼굴을 한번 내려다본 후, 푸석해진 머리를 쓰다듬고는 큰 숨을 내쉬는 민서다.
"지현우 씨 보호자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드르륵'하고 진료실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가 본다.
"아... 오셨어요? 여기 앉으시죠?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의사 선생님이 애써 웃음 지으며 말을 건네는 것으로 보아, 아마 조금 긴장을 한 것 같다.
"어제 많이 당황하셨죠? 갑자기 찾아뵙고는 어려운 이야기드려서..."
"아..네 당황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네요. 사실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요."
"어제는 소울뎁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의사로서 말씀드리기보다는 그분들 이야기를 듣도록 배려한다는 것이... 그 사람들 너무 몰아치듯이 이야기해서 원... 아마 기술자들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 주세요.
제가 오늘 뵙자고 한 건, 예상하셨겠지만 어제 미처 말씀 못 드린 내용과 의사로서의 소견을 좀 더 드리려고 해서입니다."
"흠... 어젯밤에는 너무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사실 지금도 많이 혼란스러워요."
"보호자님, 먼저 남편분 그러니까 지현우 환자분께서 코마상태로 누워계신 지 11개월 넘게 아무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고요, 지금 의학기술이 인공지능이니, 무슨 신기술이니 해서 십수 년 전보다도 발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코마상태에 대한 치료는 요원한 것이 사실입니다. 무작정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지요. 대부분의 코마상태 환자분들은 몇 년 길게는 십여 년 동안 그 상태가 유지가 돼요. 물론 드물게 깨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기약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호자님도 잘 아실 것이고요.
제가 담당의사로 보호자님과 환자분을 지켜보면 참 안타깝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시는 것도 그렇고, 간접적으로나마 지켜보면 두 분 사이가 꽤나 좋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어서 의사인 저로써도 지현우 님이 깨어나기를 바랄 정도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앞을 길게 하는 걸까? 일단 기다려보자.'라고 생각하는 민서다.
"어제 그 회사사람들이 와서 이야기한 기술말인데요, 그게 기술적으로는 검증된 기술이에요. 당연히 의학적으로도 가능하고요. 어제 이야기가 나왔다시피 현재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완성단계에 이르렀고요. 참 신기하죠? 프로그램이나 데이터를 저장하듯 기억을 저장한다뇨. 거기에 그 기억을 학습한다니... 좀 민감하지만 이건 영생이라는 것에 한걸음 다가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기술적으로는 완성단계라고 하더라도 정상인을 상대로는 법적으로 그리고 사회통념상으로 넘어가야 할 산이 많습니다. 뭐 물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부자인 사람들은 어떤 형태든 이 기술을 자신들에게 적용해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기술적으로는 완성단계이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보니 법적으로나 사회통념상으로 먼저 적용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쪽으로 선도회사들이 눈을 돌리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게 코마상태의 환자라던가, 코마상태보다 더 안 좋은 뇌사상태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분야죠.
그런데, 코마상태의 환자를 대상으로는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곳이 몇 군데 없어요.. 미국에서 시도를 했다는 소식과 논문이 일부 있긴 합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시도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적용하려면 아무래도 환자의 조건이 중요한데, 저희 병원이 판단하기로는 지현우 씨가 그 조건에 부합된다는 판단이에요."
"그런데요?"
"소울뎁이라는 어제 그 회사, 저희 병원하고 기술협력 관계에 있는 회사입니다. 이 분야에 대해서는 저희 병원장님을 포함해서 경영진도 관심이 많은 상태이고요. 아 물론, 보호자의 동의 등 복잡한 단계와 법적인 절차도 해결해야 할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돈이 상당히 많이 드는 일이기도 한데.... 흠... "
담당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한다.
"보호자님만 동의하신다면, 이번 임상은 전액 저희 병원과 소울뎁에서 지불하고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저....잘 모르겠어요. 기억을 이식한다는 게 어떨지... 그게 남편한테도 도움이 될지.. 저한테도 어떨지... 모르겠어요..."
"보호자님,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침대에 누워 계시는 남편분은 그 상태에서 변함이 없을 거예요. 다만, 의식이 다른 육체 아... 죄송합니다. 육체가 아니고 의식이 다른 장치로 옮겨지는 거고, 그렇게 되면 지금 갖고 계시는 스마트폰으로 남편분과 통화하듯이 대화나 일상생활을 누리실 수 있는 겁니다. 그렇죠. 남편분과 언제든 통화한다고 생각하시면 가장 맞을 거예요. 또, 의식이 이전된 이후의 새로운 정보도 남편분의 이식된 기억에 계속 저장되니까 정확히는 과거의 남편분이 아니라 현재의 남편분과 통화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두 분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시면 좀 와닿으시려나요?"
"남편... 현우 씨와 통화요?"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민서다.
"통화요....... 현우 씨와 참 많이 나누었는데...사귈 때도....결혼한 후에도, 그 사람이 출장을 가서도 매일 빼놓지 않고.......흐흑....."
서서히 밀려오는 과거의 기억이 더욱 민서를 슬프게 한다. '통화'라는 단어가 민서와 현우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이길래 그리도 서글피 울기 시작한 걸까? 우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담당의사에게는 한 순간의 정적이었겠지만, 민서에게는 현우를 만난 후 지금까지의 9년이라는 시간이 영화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시간이다.
9년 전의 시간 속에 민서와 현우는 풋풋한 사회 초년생이었고, 그 둘은 친구의 소개로 카페에서 막 처음 만난 흔히 보이는 젊은 남녀였다. 원래 친구가 소개해주려던 남자는 동호회의 다른 남자였지만, 운명이란 것이 그런 것인지 전화번호를 헷갈려서 동호회의 다른 남자, 현우가 연결된 것이다. 우연이라고 해도 이상하리만큼 마침 시간이 있던 현우는 그렇게 민서를 만났다. 그리고 만난 첫자리에서 그 둘은 알게 되었다. 서로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라는 것을.
정적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쓰이는 단어인지 모를 정도로 두 명이 만나면 스몰토크부터 영화이야기까지 대화가 멈추지를 않았었다. 죽이 맞는 상대라고나 할까.
그렇게 만남을 이어가기를 2달, 현우는 직장 내 부서 이동으로 민서와는 3시간 걸리는 타 지역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 둘의 이야기는 매일 '통화'를 통해 이어진 것이다. 물론 어느 커플도 그렇듯 통화로 다투기도, 울기도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으며 끊이지 않는 대화가 이어지기를 2년, 둘은 마침내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된 후, 민서는 죽이 맞는 현우와 꼭 닮은 아이를 갖고 싶었었다. 현우도 민서와 꼭 닮은 아이를 갖고 싶었던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하늘이 돕지 않은 것인지, 운이 나빴던 것인지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그 둘 중 한 명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없으면 어떠랴. 여전히 둘은 대화가 끊이지 않는 그런 사이였던 것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더라도, 때로는 서로 서운한 감정이 있었을지라도, 그리고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도 서로가 견뎌 나갈 수 있는 힘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앞으로도 행복은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그 사고 전까지는 말이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울었죠? 갑자기 눈물이 나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며 말한다.
"아... 아닙니다. 제가 슬픈 기억을 상기시켜드렸나 보네요."
민서는 눈물을 닦아 내고, 서서히 고개를 들고 담당의사를 보며 말한다.
"저... 남편... 현우 씨와 다시 통화하고 싶어졌어요. 아니, 통화하고 싶어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