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 그랜드캐니언이 있다고?
누군가를 알고 싶으면 함께 여행을 떠나라.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한 번쯤 보았던 문구다. 이 문구가 인생의 진리라고 느끼게 된 것은, 내가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친구와 단둘이 해외여행을 갔을 때였다. 인터넷에서 종종 보았던 ‘친구와 단둘이 여행 후 관계를 끊게 됐어요’와 같은 종류의 사건은 아니었지만, 멋모르고 떠났던 둘만의 여행은 친구와 나는 다른 부류의 사람임을 깨닫게 했다.
나의 첫 해외여행처럼, 단편적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다니며 놀고먹고 자며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면 내가 알지 못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 심지어 나조차도 모르던 나의 모습까지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대부분의 경우는 후자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나와 서영이는 어떨까. 평소에도 독재자라는 인상이 박혀있는 터라, 더 이상 보여줄 안 좋은 모습은 없다. 뭐 싸워봤자 내가 이기는데. 이런 내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바로 치앙마이의 그랜드 캐니언에서!
그랜드 캐니언.
대부분의 사람들이 듣자마자 미국을 떠올리지만, 우리는 지금 태국. 그랜드캐니언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그럼 도대체 어디에? 정정하자면,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불리는 치앙마이의 워터파크다. 왜 한국에도 경주의 캘리포니아비치, 용인의 캐리비안베이가 있는 것처럼 그 정도의 느낌이랄까? 사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보단 가평의 빠지가 생각나지만 말이다. 숙소의 잔잔한 수영장에 흥미를 잃어갈 때쯤, 지인에게 추천받은 그랜드캐니언. 검색해 보니 후기도 나쁘지 않다. 그래 여기지. 가서 열심히 놀고 오자. 입장권을 내밀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서영이와 나는 연신 와! 를 외쳐대며, 놀이 기구가 잔뜩 모여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차피 잘 보일 사람도 없으니 망가지는 거 신경 쓰지 말고 놀아야지. 한국에서 워터파크라 함은 왠지 예쁘게 화장을 해야 할 것만 같고, 몸매를 드러내는 비키니를 입어야 할 것 같지만 여기는 아니다!
빠지에서 한 번도 놀아본 적 없는 우리는 잔뜩 망가져가며 생전 처음 본 놀이기구를 마음껏 탔다. 그러던 와중 우리의 눈에 들어온 다이빙대.
“와 서영아 우리 저거 해보자”
“오 완전 좋아."
고소공포증이 뭐람? 나 김혜미 놀이기구 하나는 자신 있다고. 성큼성큼 우리는 다이빙 대 앞으로 갔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3M, 5M, 11M 다이빙대. 3미터는 어린이용 아니야? 콧방귀를 뀌며 5미터로 향했다. 근데 응? 이게 5미터라고? 두 눈을 비벼서 다시 봐도 이건 5미터가 아니다. 분명 밑에서 볼 때는 낮아 보였는데 올라오니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게다가 그랜드캐니언은 저수지에서 만들어져 바닥이 훤히 보이는 수영장과 다르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까맣게 보인다는 것. 깊이를 확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게 놀던 물이 블랙홀처럼 보인다. 주저하고 있는데 안전요원이 빨리 뛰라고 성화다. 아 잠시만요. 저 못 뛰겠다고요. 뒤를 돌아봤다. 내가 뛰기를 기다리고 있는 서영이. 도저히 못 하겠다 싶어 서영이에게 슬쩍 물어본다.
“니가 먼저 뛸래..?”
아 참으로 멋없는 물음. 이렇게까지 민망할 수가 없다. 큰소리를 쳐서 여기까지 올라와 놓고선 동생을 앞장세우는 꼴이라니.
“그래”
조금 고민하더니 서영이가 뛰어내렸다. 서영이가 뛰어내리는 걸 분명히 봤는데 도저히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물에 젖은 채로 올라오는 서영이가 외친다.
“언니 별로 안 무서워! 진짜!”
내가 무서워하는 걸 서영이도 느꼈나 보다. 괜찮다고 하나도 안 무섭다고 나를 다독여주는데, 근데 어쩌지 서영아? 나 도저히 못 뛰겠어.
계속 주저하는 나를 보더니 서영이가 하는 말.
“언니 그럼 3미터에서 뛸래?”
아까 어린이용이라고 거들떠도 안 봤는데, 어느새 나는 어린이가 되어 3미터 다이빙대로 향하고 있었다. 근데 3미터도 높기는 매한가지다. 3미터를 어린이용이라고 무시하던 아까의 나를 쥐어박고 싶다. 안전요원은 여전히 3미터에서도 점프를 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재촉하다 지쳤는지, 달래주기 시작한다.
“봐봐! 저기 아기도 뛰잖아. 별로 안 무서워. 너 구명조끼도 입었는걸.”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결국 서영이가 외쳐버리고 말았다.
“언니 쫄보가!”
끝내 들켜버리고만 나의 본모습.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이다. 뛰어내리지 않으면 영영 쫄보로 기억될 것만 같은 이 순간. ‘그래 그럼 한 번 뛰어보자!’를 속으로 외치며 나는 두 눈 질끈 감고 뛰어내렸다.
해냈다!
감격에 차 위를 올려다보았을 땐 나를 향해 손뼉을 치고 있는 서영이와 안전요원이 있었다.
뛰고 나니, 그제서야 나를 위해 한참을 기다려준 서영이와 안전요원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올라왔다. 무서움과 부끄러움은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이후 물놀이를 끝내고 썽태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영이에게 물었다. 다이빙대에서 한참 동안 못 뛰는 언니를 보니 어땠냐고.
“뭐 언니도 쫄보일 때가 있구나 싶더라. 근데 그래서 뭔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서영이의 말을 들으니,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숨겼던 모습이 어쩌면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사람이 실수를 하면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여행을 함께 하면 서로의 본모습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번 여행에서도 진리로 통했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서로의 본모습은 멀어지게도 만들지만 때로는 가까워지게도 만든다는 것. 인생의 진리가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