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닌 함께라서
‘항공권과 숙소만 정하면 여행 계획의 90프로는 완성이다 ‘라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아마도 내가 즉흥형의 인간인 탓이다. 계획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지만, 일단 나는 항공권과 숙소만 정하면 여행 준비가 절반 넘게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그렇게 무계획의 인간인 나는 여행의 90프로를 해결하고자, 치앙마이행 항공권을 끊고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휴대폰에 있는 에어비앤비 앱을 켰다. 내가 완전한 무계획의 인간이었다면, 숙소마저 정하지 않고 항공권만 끊은 채,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1)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았고 2) 동생이라는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고 3) 서툰 영어실력의 소유자라는 이 세 가지 악조건이 있었기에, 숙소를 미리 예약하는 편이 안전했다. 사실 세 가지 악조건은 표면적인 이유다. 그보다는 내가 베테랑 여행자들처럼 영어를 써가며 현지에서 숙소를 구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 크다. 왜, 한창 나영석 피디의 여행 프로인 꽃보다 청춘이 유행했을 때, 그들은 직접 현지에서 숙소를 구하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여행의 낭만을 느꼈지만, 나는 그들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써가며 방값을 흥정할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직접 발품을 팔아 숙소를 구하면 룸 컨디션도 확인할 수 있고 방값도 흥정할 수 있다는 명확한 장점이 있다지만 내가 원하는 조건의 방이 없을 수도 있고 그런 방을 구하기 위해선 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여행 가서 놀고 싶지, 숙소를 구하는데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실력으로 그런 돌발 상황을 맞닥뜨릴 자신도 없었다. 여행은 우연치 못한 상황의 연속일 텐데, 기왕 한국에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해결하고 가는 게 최선이다 싶었다.
그렇지만 현지인과 소통할 수 있는 낭만도 포기하지 못하는 나는 욕심쟁이.
지난 4월 혼자 한 달 살기 할 숙소를 구할 때,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구해야 했는데 그때 알게 된 에어비앤비. 쉽게 말하면 호스트가 자신의 숙소를 올리고 게스트가 연락을 취해 가격을 지불하고, 머물게 되는 구조다. 에어비앤비에는 원룸부터 독채까지 다양한 종류의 숙소들이 올라오곤 하는데, 보통 호스트들은 자신의 집을 내어주거나 세컨 하우스를 게스트에게 내어준다. 현지인의 집에서 머물게 되지만 직접 만나서 영어로 소통해서 숙소를 예약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이 바로 되는 메시지로 주고받기 때문에 예약이 다소 수월하다. 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은 내가, 적당히 현지인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공간에 지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호스트와 같이 쓰는 숙소도 있지만, 나는 서영이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개별적인 공간을 원했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에어비앤비에는 다양한 종류의 숙소가 있었기에 이런 부분 또한 조건을 선택해서 숙소를 정했다.
2주라는 생각보다 긴 시간 머물러야 했기에 숙소를 정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매일 에어비앤비 앱을 들락날락하며 검색한 결과, 두 가지 종류의 숙소를 찾았다. 하나는 치앙마이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숙소와, 다른 하나는 현대식 느낌이 가득하면서 수영장이 딸린 숙소다. 서영이와 함께하는 여행이었기에 숙소를 정할 때 역시 서영이의 의견이 중요했다.
1번. 완전 치앙마이스럽고 근처에 음식점이 있지만 수영장이 없고 화장실이 다소 낡았다.
2번. 현대식 느낌이 가득하고 근처에 마트가 있고 큰 수영장이 있으며 화장실이 깨끗하다.
사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우리로서는 답은 나와있었다. 큰 수영장이 있는 2번 숙소. 그런데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1번 숙소가 주는 치앙마이스러운 느낌이 너무 끌리는 탓이다. 치앙마이에 온 느낌은 내야 하지 않겠냐며 고민하던 중, 서영이가 멋진 의견을 낸다.
“어차피 2주 동안 가는데, 한 3일 정도는 첫 번째에서 묵고 나머지는 두 번째 숙소에서 묵으면 안 돼?”
이렇게 멋진 방법이 있었는데 왜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2주 살기’라는 컨셉에만 집중한 나머지, 집을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본 탓이다.
아무튼 서영이의 멋진 의견을 토대로 숙소를 예약한다. 다행히도 치앙마이는 숙소가 대부분 저렴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두 군데의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
오늘은 한국에서 열심히 정한 두 번째 숙소로 떠나는 날.
출발하기 전인데, 벌써부터 설렌다. 사실 첫 번째 숙소는 치앙마이 가득한 느낌이어서 치앙마이에 온 걸 실감하기 충분했지만, 역시나 우려했던 것이 문제였다. 바로 화장실.
벌레가 나오거나 그런 것은 아닌데, 낡았다. 낡아도 너무 낡았다. 켜진지도 모르겠는, 키나 마나 한 화장실 조명. 샤워기라고 하기엔 애매한 호스와 그에 걸맞게 약하디 약한 물줄기. 온수가 나오지 않아 차가운 물. 차가운데 물줄기가 약하니, 빨리 씻을 수도 없다. 외출 준비를 할 때마다 우리는 화장실 때문에 애를 먹었고, 그 탓에 두 번째 숙소로 향하는 날을 기다렸다.
우리가 가는 숙소는 디 콘도 핑
사실 치앙마이에는 디콘도 숙소가 많은데, 센트럴 페스티벌이라는 쇼핑몰 옆에 아파트 단지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디콘도 사인, 디콘도 님, 디콘도 핑 (지금은 디콘도 린 까지 있다.) 세 개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형태의 콘도가 있는데, 내가 알아본 바의 가장 큰 특징은 수영장의 모습이다. 디콘도 사인은 혼자 한 달 동안 왔을 때 머문 숙소였는데 숙소 한가운데에 큰 수영장이 있고, 우리가 이번에 묵을 숙소인 디콘도 핑은 수영장이 강처럼 되어있다.
수영장이 강처럼 되어있다는 것에 끌려 곧바로 디콘도 숙소 세 개 중 디콘도 핑을 예약했다.
숙소 입구에서부터 크고 멋진 수영장이 우릴 반긴다.
“미쳤다 나 지금 빨리 물에 뛰어들고 싶음”
“언니 나도. 빨리 가서 수영복 갈아입고 오자”
“근데 수영하면 배고프지 않겠나? 근처에 바로 마트니깐 물놀이하면서 먹을 간단한 음식 좀 사 오자.”
“콜”
우리는 짐을 숙소에 던져두다시피 두고 곧장 마트로 향했다. 디콘도는 센트럴 페스티벌이라는 큰 쇼핑몰이 옆에 있긴 하지만 다른 관광지와는 떨어져 있다. 쇼핑몰을 제외하면 숙소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올드타운이나 님만해민까지는 차로 10~15분이 걸리고, 그렇기 때문에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선 마트에서 음식을 구입해서 먹거나 귀찮더라도 택시나 버스를 타고 올드타운까지 가야 한다. 그 탓에 혼자 한 달 동안 이곳에 머물 때, 마트를 가는 일이 처음에는 즐거웠지만 나중에는 숙제가 되었다. 여행은 좋아해도 입맛은 초딩인 나였기에 태국에서도 치킨이나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를 즐겨 먹거나 아니면 도전하기 쉬운 음식만 먹어서 현지 음식점을 찾아가는 일보단 마트에서 음식을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트 가는 게 귀찮던 나였는데, 왠지 서영이와 함께하니 그토록 숙제 같던 일이, 설레는 일로 변했다. 왜, 친구들이랑 다 함께 펜션 놀러 가기 전 마트에서 장 볼 때가 제일 설레는 것처럼. 물놀이하면서 장 보는 것만큼 설레는 일도 없으리라 확신한다.
숙소도 마음에 들고 수영장도 너무 좋다. 혼자 왔을 때는 그냥 혼자 기뻐하던 나였는데 옆에 동생이 있으니 더욱 신이 나버린 나. 혼자 여행하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이럴 때는 누가 곁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하긴 하다. 행복한 마음이 가득해서일까, 뭐가 웃긴지도 모르지만 깔깔대며, 발걸음을 한없이 가볍게 마트로 향했다.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과자와 빵과 시원한 콜라를 잔뜩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놀이할 채비를 마치고 그 어느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수영장으로 향한다. 수영장 바로 앞에 있는 썬 베드에 자리를 잡고 바로 물로 풍덩!
아뿔싸. 물이 너무나도 차갑다. 물놀이할 생각에만 빠져 날씨를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혼자 왔을 때는 4월은 치앙마이에서도 제일 더운 달이다. 지금은 1월. 동남아 지역이기에 1월이어도 덥긴 하지만, 4월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이 얼음장이다. 서영이가 없었다면 춥다며 바로 수영을 포기했을 정도다. 그렇지만 나는 열심히 함께 놀 수 있는 동생이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서영이와 나는 물을 좋아하고 둘 다 어릴 적부터 수영을 배워놔서 수영도 곧잘 한다. 게다가 수영장도 강처럼 길어서 열심히 놀다 보면 추운지도 모를 것이다.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면 되지!
그런데 이런 호기로운 마음도 몇 분이 채 가질 않는다.
“아 너무 춥다”
“언니 나 못 하겠다 물이 왜 이래 찹노”
“빵이랑 콜라 먹으면서 쉬자”
물놀이 잔뜩 할 거라던 우리는, 물의 온도를 맛보자마자, 여행 와서 감기에 걸리며 손해라며 후퇴를 하기로 했다. 수영장에서 기가 막힌 사진도 남기려고 선글라스도 챙기고 예쁜 수영복도 입고 왔는데, 정작 추워서 입이 보라색이 된 나만, 사진에 있다.
수영장만을 기대하면서 두 번째 숙소에 왔는데, 앞으로 수영은커녕 물에 발도 못 담글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언제나 찾아오는 법.
아무리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도 오긴 오나 보다. 하다못해 지금 사 온 콜라에서조차!
서영이와 신나게 마트에 가서 사 온 콜라가 도무지 열릴 기미가 없다. 병따개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우리에게 병따개는커녕 병따개 비슷한 것도 없다. 숙소에도 보나 마나 없을 텐데.
이렇게 사 온 콜라가 먹지도 못하고 버릴 판이다. 유리병에 담긴 콜라라, 잘못했다간 깨져 버릴 것 같은데.
“서영아 이거 어떻게 하지 도저히 안 따진다”
“수건으로 입구 감싸서 세게 돌려도 안 따지나?”
“돌리는 구조가 아닌 듯”
“아니면 그 맥주 따는 것처럼 모서리에 뚜껑만 딱 치면 안 되나?”
“유리병이라서 무섭다. 내가 했다간 와장창 될 듯”
우리의 안쓰러운 대화가 들리는 것일까. 지나가던 아저씨가 멈춰 선다. 그리곤 자신에게 건네라고 손짓을 한다, 우리는 갸우뚱한 표정으로 콜라 두 개를 건넨다. 콜라 한 병을 병따개처럼 이용해 나머지 콜라 한 병을 똑! 하고 딴다. 휘둥그레진 서영이와 나.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다. 땡큐 땡큐를 외치며 서영이와 나는 웃으며 콜라 두 병을 받아 든다. 따봉을 외치며 지나가는 아저씨. 아저씨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는데 서영이가 말한다.
“언니 근데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따?”
아 그렇네. 하나를 병따개처럼 이용해서 땄으니, 하나는 딸 수가 없다.
“저 아저씨 다시 불러올까? 이것도 따달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아저씨가 간 쪽을 쳐다봤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하는 수 없지 이거 하나로 나눠마시자. 어차피 추워서 수영장에 오래 있지도 못할 것 같다”
“맞다 하나라도 먹을 수 있는 게 어디고”
예상치 못하는 상황에 쩔쩔매는 게 싫어서 숙소도 한국에서부터 알아보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수영장의 물 온도, 설레는 마음에 병따개를 생각 못 했던 콜라. 나는 계획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게 분명하다. 아무렴. 즉흥형의 인간의 본성이 어디 가겠나.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재밌기만 하다. 춥지만 수영은 했고, 비록 다는 아니지만 한 병이라도 콜라를 먹을 수 있게 되었지 않나. 이런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보다 웃기기만 한 이유는 혼자가 아니어서. 돌발 상황에도 웃어넘길 수 있는 서영이가 있어서 아닐까.
함께하는 여행이 더욱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