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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미 Oct 27. 2022

앙깨우 호수에서의 고백

치앙마이 대학교 투어


서영아, 누군가 여행에서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신나는 액티비티를 할 때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눌 때도 아닌. ‘지는 해를 바라보며 좋아하는 노래를 들을 때’라고 말할 거야. 그 사소한 행위는 내가 이 지구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느끼게 만들면서, 또 얼마나 작은 것 하나에 행복을 느끼는 존재인지를 알게 하거든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치앙마이에 머물 때,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장소를 찾고야 말았다. 따가운 한낮의 햇빛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곳.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데려오리라 다짐했던 곳. 앙깨우 호수.


치앙마이 대학교 내부에 위치한 큰 호수. 내가 이곳을 처음 만나게 된 건, 치앙마이에 혼자 있는 것이 조금 지루해져 갈 때쯤이었다. 감성적인 인테리어의 카페 투어도 시들해져 가고, 좋아하던 수영마저 따분해져 갈, 그쯤이었다. 북부에서 제일 큰 대학교인 치앙마이 대학교를 둘러볼 수 있는 투어를 가게 된 것이. 대학교를 휴학하고 여행을 왔으니, 캠퍼스 감성도 느껴보고 싶을 만한 시기였고, 내가 또 언제 다른 나라의 대학교 캠퍼스를 구석구석 볼 수 있겠나 싶은 마음에 냉큼 투어를 예약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대학생도 교복을 입는 모습이, 대학교 투어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건만, 그러나 대학교 캠퍼스가 뭐 별거 있겠나. 커다란 땅에 있는 오래되고 거대한 건물들의 연속. 그것이 치앙마이 대학교의 첫인상이었다. 그렇게 대학교가 내게 건조한 인상으로 박힐 무렵에, 나는 만나고야 말았다. 내가 이 투어에 끌리듯이 예약한 이유를. 그건 바로 투어의 끝자락에 만나게 된 앙깨우 호수였다. 듬성듬성 있는 벤치와 무성한 나무들. 그 속에 존재하던 앙깨우 호수는 내가 가진 치앙마이 대학교의 건조한 인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허나, 앙깨우 호수 자체가 아름다운 경치를 가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앙깨우 호수의 대단한 경치를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것이 뻔한 호수다. 경치 하나로만 사로잡기엔 이 세상에는 알프스 산맥의 호수와 같이 대단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토록 이 호수를 사랑한 이유는,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이었다. 붉게 지는 노을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 앉아서 음악을 듣는 이들과, 수다를 떠는 학생들. 아장아장 걷는 아가와 웨딩사진을 찍는 부부들. 다양하고 제각각인 사람들이 누구 하나 튀지 않고 호수 속에 어우러지던 그 자태. 화려하지 않던 호수는 그렇게 모든 것을 한 데로 모아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그 빛을 구경하는 걸 즐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만히 앉아 그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시간은 금방 갔고 내 마음은 따스한 무언가로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가만히 앉아서 바라본다는 그 사소한 행위 하나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서영이에게 제일 보여주고 싶은 장소였다. 내가 왜 치앙마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말을 하기 어렵다면, 나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그저 이 장소면 보여주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동생을 데리고 이곳에 와 있다. 그때의 나처럼, 서영이 또한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는다.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 시간 속에서 대화는 필요 없다. 나는 그런 서영이를 바라본다.



「 서영아,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도시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너도 이곳을 좋아하기를 바랐다. 너를 데리고 여행을 오겠다는 그 목표로 작년을 버텼어. 휴학하고 실컷 놀겠다는 마음을 접고 다시 일을 시작한 것이 그 때문이라면 사람들은 믿을까?


하필 왜 너를 데리고 이곳에 오는지 많은 사람들이 물어올 때, 나는 그냥이라고 대답을 하곤 했다. 그냥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사실은 네가 나보다 더 많은 걸 누렸으면 해서 였다는 걸. 이제야 고백해.


사실 나는 동생인 네가, 얄밉고 부러웠어. 심지어 미워하기도 했지. 여유롭지 못한 집안에서, 하고 싶은 거나 갖고 싶은 게 생기면 곧잘 엄마에게 해달라고 조르는 네가 참 속도 없다고 생각했거든. 우리 집 사정은 알고 저러는 걸까, 참을 줄 왜 모르지? 이기적이다 라고 생각했어. 그런 너에 못 이겨서 해주는 엄마를 보고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몰라. 그런 너를 나는 억누르고 싶었어. 참 못 됐지? 내가 그런 감정을 느꼈으니깐, 나는 참았으니깐 너도 그래야 한다고 말이야. 같은 자식인데, 나는 의젓해야 하고 왜 너는 철없어도 되는 거지?라는 못난 생각이 자주 들었어.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다가, 가지지 못한 나를 불행히 여기고 그러다 욕심을 버리던 사람이었거든. 그러니 욕심을 낼 줄 아는 네가 샘이 났던 거지. 너의 입장은 생각도 못 하고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법보단 욕심을 버리는 법을 배운 내가, 처음으로 욕심을 냈던 것은 여행이었어. 의젓하고 씩씩한 첫째가 아니어도 되고,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된다는 걸 알게 해준 것이 여행이었거든. 누군가의 딸이나, 언니나, 친구가 아니라 그냥 나로서 있게 해줬단 뜻이야. 그냥 나로서 있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그건 말이야, 누군가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나만 신경 쓰면 된다는 건데, 누군가를 위할 필요 없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말이야. 그렇게 나만을 신경 쓰다 보면, 우습게도 내가 얼마나 사소한 사람인지 알게 해. 나는 정말 사소한 것 하나에도 행복해하더라고. 그전에는 그건 행복이 아닌 줄 알았어. 행복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던 크고 거대한 건 줄 알았거든. 근데 내가 갖고 있던 작은 것들도 행복인 거 있지? 나는 작고 하찮은 것에도 행복을 느껴도 된다는 걸 그렇게 알았어. 여행은 그렇게 행복이라는 감정을 구석구석 느끼게 만들었어.


그걸 깨닫고 나니, 너를 억누르려고 했던 내가 참 못났더라. 너는 너대로의 아픔이 있었을 텐데. 엄마 아빠의 딸로서만, 나의 동생으로서만 너를 봐서 미안해. 너 있는 그대로를 내가 보지 못했어.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보려고 노력할 거야.

내가 사랑하는 이 장소에서 약속해. 네가 그렇게 내가 느꼈던 것처럼 날것의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어.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에게도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거 말이야. 너무 뻔한 말이지만, 보통의 명언들은 다 뻔한 말인 거 알지?


내가 제일 사랑하는 도시에서, 제일 사랑하는 곳에서. 뜨거운 노을을 배경 삼고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는 네가 너무 눈물이 날 만큼 예쁘다. 그때의 나처럼.


사랑하는 언니가」


그리고 한참 끝에, 옆에서 서영이가 나지막이 뱉은 말.

“언니 데려와줘서 고마워 또 오고 싶다”


그 말은 우리의 여행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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