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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미 Oct 09. 2022

행운을 빌어요 촉디 카!

선데이 마켓의 인연

동남아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야시장이다. 동남아 여행을 왔는데, 야시장 구경을 안 했다? 그러면 동남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섭섭해할게 분명하다. 동남아 지역은 더운 날씨로 인해, 낮 동안은 시장이 열리지 않고 해가 없어 활동하기 시원한 밤 시간대에 시장이 열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치앙마이, 이곳에서 역시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야시장이 열린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선데이 마켓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데이 마켓은 일요일에만 열리는데, 왓 프라싱과 타페게이트 사이 약 1km의 거리에서 열리는 대규모 야시장이다.       


 치앙마이에서 알아주는 대규모 야시장답게, 거리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눈을 사로잡고, 풍성한 먹거리들이 입을 사로잡는다. 그 덕에 거리에는 물건에, 먹거리들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빼곡하다. 선데이 마켓이 열리는 올드타운의 낮은 한없이 조용하고 평화롭다. 낮에는 너무나도 조용해서 지루하기까지 할 지경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태양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는 밤이 되면 올드타운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숨어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하며 타패게이트에는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관광객들의 사진 찍는 소리, 그들의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가격 외치는 소리들로 채워지고, 타패게이트 안쪽의 상점들은 그 소리들과 어울리는 음악들로 거리를 채운다. 그렇게 금세 올드타운은 시끌벅적한 곳으로 변한다.     


이제껏 서영이에게 올드타운의 낮의 모습만 보여줬는데 밤의 모습을, 그것도 이렇게나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서영이는 같은 곳이 맞냐며 놀랄 것이 뻔하다. 게다가 오늘은 선데이 마켓이 열리는 일요일의 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올드타운의 모습은 오늘 절정을 찍을 것이다.       


시장은, 사람 대 사람이 하나의 물건을 가지고, 서로 각자 분명한 입장 차이가 존재하는 곳이다. 제값보다 싸게 사 합리적인 소비를 하려는 사람과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기려는 사람.  .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은 더더욱 그렇다. 이런 곳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조리 있게 또박또박 설명해야 할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지 않다. ‘깎아주세요’ 와 ‘더 이상은 안 돼!’ 와 같은 소리들만 들리는 이곳. 분명한 입장 차이가 만들어낸 제일 확실한 의사소통. 서툰 태국어와 영어실력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언어 실력이 아닌 확실하게 깎겠다는 합리적이고도 뻔뻔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한국에서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사소한 직원의 실수에 컴플레인을 걸지 못하는 소심이다. 가게에 들어섰을 때, 직원이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라는 물음조차 제발 걸어주지 말았으면 하고, 괜히 가게에 오래 있거나 직원의 시간을 많이 뺏는 것 같다 싶으면 딱히 원하는 게 없어도 무엇 하나 사고서야 가게를 나오고 마는 그런 파워 소심쟁이다. 그렇기에 나는 물건을 살 때 깎아달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고 그런 말을 하기는커녕 옆에서 깎아달라고 하는 엄마의 팔을 찰싹 때리며, 그러지 말라고 말리기 바쁜 사람이다.      


그런 내가, 선데이 마켓에서 상인들의 눈을 맞추며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타오라이카’

(얼마예요?)를 입에 달고 ‘추어이 롯 너이나카’ (좀 깎아주세요.)를 외친다. 한국에선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사버리는 난데, 여기선 깎아달라고 말할 때는 애교 섞인 목소리와 함께 불쌍한 눈빛을 보내는 것까지 깨달은 뻔뻔하고 합리적인 소비자가 되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통하고, 뻔뻔하게 물건의 값을 깎는 내가 대견해서 나는 동남아 야시장을 참 좋아한다. 동남아 야시장은 이방인인 내가 이곳의 현지인과 가장 확실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진 곳이다. 이런 매력을 나만 알 수는 없다. 좋은 건 함께 해야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로, 나는 50대의 뻔뻔한 우리 엄마의 영혼이 제대로 빙의해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깎아달라고 말할 때는 옆에서 말리던 나였는데, 이곳에선 엄마 못지않게 서영이를 부추기며 무조건 깎으라고 말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서영이는 내가 한국에서 그럴 때처럼, 처음에는 쭈뼛대는가 싶더니, 나의 성화에 못 이겨, 물건을 깎기 시작한다.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야시장의 또 다른 매력 아니겠는가. 열정적으로 물건을 깎다 보면 슬슬 서영이의 입에서 나와야 할 소리가 있다.

“언니 배고프다”

그렇지 아무렴. 1km나 되는 마켓을 구경하고 물건을 깎으려 흥정하며 걷다 보면, (또 한 번만 걷는 것이 아니라 구경한다고 여기저기 왔던 곳을 다시 돌아가기도 하기 때문에), 배가 부르던 사람도 배가 고파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서영이에게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이자 장소로 안내할 수밖에 없다.   

  

선데이 마켓 끝자락에 자리 잡은 와인 노점. 선데이 마켓 구석에 가면 음식을 파는 곳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 옆에서 네 가지 종류의 와인을 파는 자그마한 곳. 그곳에서 와인 잔을 건네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여인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뚜엉이다.      


노점에서 한 잔씩 와인을 파는 뚜엉은, 영어에 능통하다. 그래서 와인을 마시면서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혼자 온 손님을 옆 손님에게 소개해 주며 서로 얘기를 나누게도 한다. 그러다 분위기가 무르익거나, 뚜엉이 한가해지는 시간이 오면, 그녀도 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며 우리들과 얘기를 나눈다. 이 구역의 인싸라고나 할까. 인싸와 함께하는 순간에는 이방인, 현지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인싸가 된다.     


지난 4월, 시장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와인 노점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는 이방인이었던 나는, 뚜엉 덕에 이방인이 아닌 이 구역의 인싸가 되었고, 서영이에게도 이 진귀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싶어, 처음엔 그저 와 인만을 두 잔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젊은 서양 남자들부터, 사이좋아 보이는 부부, 머리가 히끗한 캐나다 아저씨까지 다 같이 어울려 와인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우리를 자리에 앉히며 옆 사람들을 소개해 주는 뚜엉. 그 순간, 근질거리던 입이 참지 못하고 뚜엉에게 아는 척을 했다. 서툰 영어실력으로 지난 4월에 왔었는데 나를 기억하느냐고,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뚜엉은 나를 기억한다 했다. 그리고 그때처럼 뚜엉은 와인을 잔에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주인장이 와인을 따르며 자리에 앉자, 옆에 있던 캐나다 아저씨가 관심을 보였다. 으레 그렇듯이, 여행자들에게는 당연하면서도, 진부한 얘기가 오갔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를 여행했는지. 왜 이곳에 왔는지와 같은 여행자들의 안부 인사.     


그러나 이런 얘기도 뚜엉의 와인 노점이라면 즐겁다. 이방인들만의 대화가 아니라 현지인이 중간에서 소개팅 주선자처럼 서로를 소개해 줘서 그럴까. 나는 서영이가 여행지에 와서 관광만을 하는 것보다 서툰 영어 실력으로 이들의 문화에 녹아들고, 서로의 문화를 나누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기엔 선데이 마켓에서 와인을 파는 뚜엉의 가게만큼 좋은 곳은 없다. 적당한 취기로 기분을 좋게 하는 달콤한 와인, 서로를 소개해 주는 이곳의 주인장 뚜엉, 그리고 다양한 경험과 문화로 뭉친 손님들까지.    

  

처음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듣기만 하고 묻는 말에 서툴게 대답하던 서영이가 음식이 맛있다며, 먹어보겠냐며 말을 걸고, 캐나다에서 왔다는 브래드에게 왜 이곳을 찾았냐며 묻는다. 그 후에는 정확히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이방인을 품어주던 따뜻했던 분위기 속에서, 와인을 무지하게 먹고, 인싸여행자들처럼 브래드와 SNS아이디를 주고받고, 여행지를 추천받고, 그러다 뚜엉에게 와인 서비스를 받고, 선뜻 우리의 와인값을 계산해 주던 브래드.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되던 그 순간.  


치앙마이행 티켓을 다시 끊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내게 도대체 왜 또 치앙마이를 가느냐고 묻곤 했다. 치앙마이를 한 달 가까이 있어 놓고서 또다시 동생과 2주 동안 간다니. 짧게 다녀온 것도 아니면서 다시 길게 치앙마이를 가는 상황이니, 친구들 입장에선 무슨 치앙마이에 꿀 발라놨나 싶었을거다.  

    

이제야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선데이 마켓 끝자락에서 와인을 파는 뚜엉이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새롭게 만난 브래드가 와인 값을 선뜻 내준다는 것.      


갔던 곳을 다시 가고, 만났던 사람들을 또다시 만나고 먹었던 음식을 다시 먹고, 다시 하는 모든 것들이지만 결코 같지 않기 때문에. 다시 하는 모든 것들은 식상함이 아닌 반가움이었고 그 속에는 또 다른 새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반가움과 새로움을 느낄 때쯤이면 헤어짐도 찾아오는 법이다.

여행 일정상 선데이 마켓은 한 번 밖에 올 수 없었고, 오늘은 우리가 다 함께 뚜엉의 와인 노점에서 함께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쉽고 또 아쉬웠다. 오늘이 지나면 뚜엉을 한동안 보지 못할 테고, 설령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이제는 뚜엉이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뚜엉이 더 이상 선데이 마켓에 없을 수도 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다음에 다시 보자 같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뚜엉에게도, 브래드에게도.

초보 여행자인 나도, 서영이도 그건 확실하지 않은 말임을 알았다. 마지막을 앞에 둔 우리는 어떤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 이별에 서투른 우리는 여느 여행자들처럼 ‘길 위에서 언젠가 보자’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앞으로 잘 지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뚜엉에게 물었다. 굳 럭이 태국어로 무엇이냐고.      

“촉디 카”   

   

행운을 빌어요. 당신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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