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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미 Oct 17. 2022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

고백을 위한 데이트 코스, 핑 강

성인이 되면서 내게는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생겼다. 하나는 돈이 좀 드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비해 저렴한데 단점이 있다. 단점이 꽤나 치명적이다. 솔직하다 못해 이불을 발로 걷어차게 만드는 찌질한 모습까지 드러내게 된다는 것인데, 저렴해서인지 아니면 찌질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지 나는 자주 사용하곤 한다.


지금 우리는 돈이 꽤 드는 방법을 사용해서 태국까지 왔다. 바로 여행. 큰맘 먹고 돈을 들여 솔직해지려 왔는데, 두 번째 방법까지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두 번째 방법이라 함은, 술인데, 한국에선 미성년자가 술을 먹기란 쉽지가 않고, 여기는 한국이 아니다.(집에서 합법적으로(?) 부모님이랑 같이 술을 먹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우리 집은 해당사항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미성년자인 서영이와 술을 먹을 수 있는 기회임에 틀림없다.


‘여행 와서 술을 마시는 건 필수’라고 동생에게 말하며 핑 강으로 향했다. 술 마시러 가는데 왜 핑 강으로 가냐고 묻는다면 나는 의기양양하게 답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게 진정한 코스니깐! 핑 강 주변에는 분위기 있는 술집과 맛있는 음식점이 즐비해있는데, 핑강에서 지는 해를 보고 감정을 잔뜩 끌어올린 뒤,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술까지 마신다면 서로의 솔직한 마음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우리의 일정이 마치 사귀기 전의 남녀가 고백하기 직전 데이트하는 코스 같아 웃음이 나온다. 데이트 코스의 첫 단계는 아무래도 분위기를 만드는 것 아닐까.


코스의 첫 단계를 밟기 위해, 핑 강의 다리인 아이언 브릿지에 와 있다. 아이언 브릿지는 핑 강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철제 다리다. 야경 명소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노을을 볼 것이다. 서영이와 나는 야경도 좋아하지만, 야경과 노을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노을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야경보단,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은은하게 보여주는 노을에게선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게다가 강이나 호수, 바다에서 보는 노을은 더더욱이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만 봐도 아름다운데, 그 하늘을 비추는 강이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않나. 서영이와 나는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남의 시선 아랑곳 않은 채, 다리 위에 쭈그려 앉는다.

시밀러룩이라며 연보라색으로 옷을 맞춰 입은 우리


한참을 바라보다, 사진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나가던 여행객을 다급히 붙잡고 우리의 사진을 부탁한다. 구웃을 외치는 걸 보니 기가 막히게 찍혔나 보다. 노을이 아름다우니, 사진도 당연히 멋지겠지 생각하며 휴대폰을 건네받았건만, 사진 속 우리는 영락없는 2등신. 짜리몽땅이다. 아무렴 어때. 이 멋드러진 노을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게 중요하지. 어차피 서영이와 여행하면서 사진은 포기한 지 오래니깐, 그렇게 졸지에 2등신 짜리몽땅이 된 우리는 어느새 어둑해진 아이언 브릿지를 뒤로하고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핑강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노을도 보고 사진도 남겼겠다. 우리는 분위기에 취해있었고 이제는 술을 마시며 감정에 취해 솔직해질 수 있는 찬스였다.


술집 근처로 들어서니, 다들 자기 가게로 오라며 호객행위가 한창이다. 당장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맛이나 가격보단, 한껏 감정이 고조된 우리를 기분 좋게 취하게 만들어 줄 그런 분위기를 가진 술집이다. 그 분위기란 자고로 적당한 시끄러움.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소리가 적당하고 그런 소리들이 배경이 되어, 나와 서영이가 솔직하게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그런 곳. 너무 장황하게 설명을 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별로 없는 술집’이란 뜻이다.


조금 한적해 보이는 술집으로 들어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메뉴판에서 대충 맛있어 보이는 칵테일을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칵테일이 나오고 ‘아 맛있다’ 생각하는 그 순간, 서영이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설마 한 입 먹고? 에이 이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 우리 집은 술과는 거리가 멀다. 엄마는 술을 한 잔만 마셔도 빨개지는 사람이고 아빠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집에 있는 술이라곤, 요리할 때 쓰는 맛술뿐이다. 그런 탓에 술과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술고래였던 친할아버지의 피가 제대로 흐르는지 술을 좋아하고 잘 먹는다. 그런데 동생은 엄마의 피가 제대로 흐르나 보다. 칵테일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언니 나 어지러워”

거의 눈을 감고 음식을 먹었다

열받는다. 다른 나라까지 와서 술 한잔하며 경치도 즐기고 동생과 속 깊은 얘기도 나누고 싶어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물 건너갔다. 소개팅 나온 상대방이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일어날 때도 이런 기분일까. 왜 한 잔도 못 마셔 가지곤. 분위기에 취해보겠다며 꽤 비싼 칵테일을 시킨 나도, 몇 입 마시고 어지럽다 징징거리는 동생도, 다 짜증이 났다.

 

“다시는 니랑 술 안 마신다”

얼굴이 벌게진 채로 취해있는 서영이에게 열을 내며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택시에 타자마자 서영이는 내 어깨에 기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참나,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고작 한 잔에 이 모양이라니. 나중에 대학 가서 술은 어떻게 마시려고 이러지. 화가 나다가도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동생의 대학 생활을 걱정하는 나도 어이가 없다. 그렇지만 술을 마시고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걸 보니, 걱정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성인이 되면서 술을 많이 접해봤다지만, 서영이는 이번이 처음이지 않은가? 하긴 나도 처음 술을 먹을 때를 생각해보면 무슨 알코올 소독약을 먹냐며 얼굴을 찡그린 기억이 난다.


그래, 서영이는 이번이 처음일 텐데 당연히 어색하고 취할 수도 있는 거다. 근데 괜히 나는 내가 준비해온 계획을 망친 것 같아 화가 나는 것이다. 솔직해지는 것. 따지고 보면 솔직해지는 건 술 없이도 할 수 있다. 다만 쑥스러워 술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 일뿐. 내가 준비했던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갔지만 계획의 목적은 솔직해지는 것. 그렇다면 계획의 목적만 달성하면 될 터. 지금 잠들어버린 탓에 나의 솔직한 마음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연습이다 생각하며 슬그머니 내뱉었다.


너랑 이곳에 올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커피도 못 마시고 술도 못 마시는 너지만 그래도 그걸 알게 되어서 좋다는 말을, 진작에 우리가 이렇게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을.


비록 동생의 속마음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동생을 알아가고 있었고 나는 솔직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동생에게 솔직하고도 서투른 마음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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