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투어에서 만난 그녀들
평소 서영이와 나의 대화는 세 마디를 넘기지 못한다. 사실 그마저도 대화라기보다 무언가 필요할 때 서로를 찾는 일방적인 말들이다. 나의 경우에는 심부름을 시킬 때 서영이를 찾고, 서영이는 내 것을 빌릴 때 나를 찾는다. 용건이 해결되면 도통 말을 하지 않는 탓에, 우리는 깊은 대화를 할 일이 없었다. 서로의 취향이나 고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평소의 습관은 여행을 계획할 때 걸림돌이 되었다. 보통 함께 하는 여행이라 함은 서로의 취향을 고려해 계획을 짜고 돌아다니는데, 나는 서영이의 취향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서영이랑 더 친해지고 싶어서 떠나는 여행인데, 서영이의 취향이 녹아있지 않으면 그건 말짱 도루묵이다. 서영이의 취향을 알아야 하는 것이 이 여행의 중요한 숙제였고 나는 숙제를 하기 위해 서툴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바로 질문.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땐 괜히 아는 척하는 것보다 물어보는 것이 낫다는 말.
그래서 나는 대놓고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좋아하고 어딜 가고 싶은지. 확실히 서툰 방법이긴 했다. 서영이는 선뜻 답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긴 평소에 심부름시키기만 하던 언니가 갑자기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묻다니. 서영이 입장에서는 꽤 당황스러웠을 거다. 그러나 나는 집요하게 물어댔고, 방법도 바꿔 여러 가지 선택지를 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르게 했다. 나의 노력을 알아준 것인지, 서영이는 하나둘씩 고르기 시작했고, 나는 서영이의 선택지 속에서 하나를 발견했다.
나랑 전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던 서영이가, 나와는 전혀 공감대가 없을 거라 단정 지었던 서영이가, 생각보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서영이는 나와 마찬가지로 일몰을 좋아했고 야경을 좋아했고 액티비티를 좋아했다. 일몰을 좋아한다는 서영이의 말을 들었을 때 몬쨈을 떠올렸고, 야경을 보고 싶다는 말에 도이수텝을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겐 이 모든 것을 실현시켜줄 멋진 기사님이 있었다. 바로 도민준. 이름만 보면 한국 사람 같겠지만 민준은 한국 드라마를 너무 좋아한 탓에 도민준이라는 이름을 지은 태국인 오빠였다. 혼자 한 달 살기 할 때 알게 된 기사님이었는데 한국 와서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기에, 이번 여행에서도 고민 없이 민준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다.
- 나 동생이랑 치앙마이 갈 거야 네가 너무 보고 싶어
- 나도 네가 보고 싶어. 그리웠어.
- 여행 둘째 날에 몬쨈이랑 도이수텝을 다녀오고 싶은데 우리랑 같이 택시투어 해줄 수 있어?
- 물론이지
일단 첫 단계는 통과다. 두 번째 단계가 남아있는데 택시투어의 동행을 구하는 것이다. 보통 택시투어의 비용은 8시간에 2200밧 (한국 돈으로 7만 8천 원 정도). 둘이서 부담하기엔 꽤 비싼 금액이다. 그러나 두 명이 아닌 네 명으로 돈을 나눠 낸다면? 꽤나 합리적인 금액이 된다.
편안하고도 합리적인 여행을 위해서 동행을 구해야 했다. 내가 찾은 것은 네이버의 ‘아이 러브 치앙마이’라는 카페. 혼자 한 달 살기 할 때도 유용한 각종 정보를 주고받던 카페인데, 이번에도 동행을 구하고자 접속했고 글을 올렸다.
「1/7 치앙마이 몬쨈 일몰과 도이수텝 야경투어 하실 두 분 구합니다. 」
글을 올린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댓글은 중년 부부인데 함께 할 수 있겠냐는 댓글. 고민을 했지만 나는 우리와 비슷한 또래가 좋을 것 같았다. 고심하던 차에 달린 두 번째 댓글. 20살과 26살 자매란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비슷한 또래면 상관없었는데 같은 자매에다 나이 터울까지 비슷한 우리 또래라니! 아직 얼굴도 보지 않았지만 왠지 잘 통할 것 같은 기분이다.
약속 시간을 정하고 민준과 재이와 지현 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답게 수줍게 인사를 나누고 호수로 향하는 민준의 차에 올라탔다. 서영이와 나는 먼저 말을 잘 걸지 못하는 탓에,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긴장하고 있었는데, 재이와 지현 언니는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몇 살인지, 언제 치앙마이에 왔는지, 어떤 것이 재밌었는지, 민준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서로에 대해 주고받다 보니 우리는 호수에 도착했고, 나는 얼른 내려 이곳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일까. 호수의 풍경보다는 재이와 지현 언니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분명 우리와 비슷한 터울인데 우리와는 다른 모습. 친구 같은 모습. 재이와 지현 언니는 계속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웃고 짜증을 내다가도 어느새 수다를 떠는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자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심 부러워 물어봤다. 재이와 지현 언니는 나이 차이가 꽤 있음에도 친구처럼 대화를 많이 하는 것 같아서 부럽다고. 그러자 재이와 언니는 별다를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도 학생 때는 그랬어. 재이가 대학생이 아니고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그때는 별로 대화를 안 했던 것 같아. 그런데 둘 다 성인이 되고 나서부턴 무언가 공감대가 생기더라고. 여전히 우리도 싸울 때가 있지만 공감대가 많이 생기다 보니깐 확실히 예전보다는 친구처럼 지내는 것 같아.”
언니의 답은 결국 시간이었고, 두 사람도 우리의 모습과 같았다는 말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시간은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막연함도 같이 몰려왔다. 계속해서 언니의 대답을 곱씹었다. 그리고 언니가 말한 공감대. 나는 거기서 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서영이와 나의 공감대가 전혀 없을까. 하다못해 질문만으로도 서영이와 내가 취향이 비슷한 걸 알았는데 정말 공감대가 전혀 없던 것일까. 사실 공감대는 여러 곳에서 있었다. 다만, 나의 어리석은 편견 때문에 몰랐던 것일 뿐. 서영이는 내 고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 우리가 깊은 대화를 나누기엔 서영인 어리다는 생각. 이런 나의 닫힌 생각이 공감대를 찾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친구 같은 자매가 되기 위해선 노력해야 한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부터가 첫걸음이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몬쨈으로 향했다.
몬쨈은 고산지대라 차를 타고 올라가서도 내려서 꽤 걸어 올라가야 한다. 힘들다고 나한테 어깨동무를 하는 서영이.
옛날 같았으면 손 치우라고, 나도 힘들다고 했을 텐데, 서영이가 무릎이 안 좋다는 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아까 다짐했던 ‘노력하기’ 때문인지 나는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다.
사실 나는 서영이가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 꾀병이라 생각했다. 저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매번 아프다고 엄마한테 징징거리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무릎이 아프다고 하는 것도 그냥 네가 자세가 안 좋아서 그런 거니 자세 고치라고 하기 바빴다. 서영이가 느끼는 아픔이나 힘듦을 그저 투정으로 치부했고, 어리광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영이는 자기가 좋아하던 운동을 하나둘씩 포기하기 시작했고, 병원에서 선천적으로 무릎 연골이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왜 나는 내가 힘든 것만 생각하고 서영이가 힘들고 아픈 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단정 지었을까. 나는 장녀고 나만 힘들고, 서영이는 막내니깐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서영이가 내 부축을 받으며 올라가면서 지금, 그때의 생각을 얘기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내가 너의 아픔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노력의 시작일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무릎이 많이 아픈지, 운동 포기하게 돼서 슬프진 않은지 물었다. 서영이에겐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서영이는 괜찮다고 또 다른 기회는 있을 거라 덤덤하게 말했다.
언제 그렇게 나보다 어른스러워졌는지 놀랬다. 나의 편견이 서영이와 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느끼며 우리는 몬쨈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높은 언덕은 온갖 꽃들로 뒤덮여있었고, 태양은 그 꽃들의 언덕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괜스레 눈물이 나왔다.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분명 나에 대한 후회와 서영이에 대한 안도감과 대견함이 섞인 눈물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지는 해를 보며 눈물을 닦았다. 해가 다 저물어갈 때쯤, 우리는 도이수텝으로 향했다.
도이수텝. 도이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태국어고 수텝은 절을 의미한다. 즉, 산에 있는 절이라는 뜻인데, 치앙마이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치앙마이의 전경을 보기에 제격이다. 게다가 야경이라니. 한 달 살기 하면서 두 번 정도 와봤던 곳이지만 서영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도이수텝에 가기 위해선 한 가지 관문이 존재한다. 바로 꼬불 꼬불한 산길. 도로가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는 탓에 차를 한참 타고 올라가야 하고 굉장히 꼬불꼬불하다.
나는 뭐 걱정이 없다지만, 서영이는 멀미가 심하다. 재이와 지현 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영이를 민준의 옆자리인 조수석에 앉혔다. 서영이의 멀미를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빡셌던 일정 탓에 우리는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도착했다는 민준의 말에 눈을 떠보니, 거대한 도이수텝의 입구가 우리를 맞이한다. 예쁜 야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데, 야경은 눈에 보이는 것만큼 사진에 예쁘게 담기질 않는다. 과감히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서영이와 나는 도이수텝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것도 잠시. 우리가 늦게 와서인지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가고 있었고 우리도 내려갈 준비를 해야 했다. 무언가 아쉽다. 야경을 보긴 봤는데 너무 시간이 재빠르게 지나갔다.
이런 우리의 아쉬운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차에 타려는데, 민준이 갑자기 말한다.
“차 트렁크에 탈래?”
이 말을 듣자마자 우리 넷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예스를 외쳤고, 험하다는 꼬불꼬불 길을 차 트렁크에 앉아 서로를 붙잡으며 노래를 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우리가 너무 멋진 것 같다며, 언제 차 트렁크에 타서 오겠냐는 말을 나누며 웃어댔다. 중간 지점쯤 와서 민준은 차에서 내려 야경과 트렁크에 타고 있는 우리 모습을 카메라 담았다.
오늘 찍은 수많은 사진 가운데, 이 사진은 정말이지, 날 것의 모습이었다. 바람을 많이 맞아 꼴은 엉망인 데다, 사진은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보였다. 그냥 이 순간을 즐기며 웃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 순간만큼 서영이와 나는 진정으로 함께하는 것이 분명했다.
멋진 하루였기에 재이랑 지현 언니와 함께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우리는 여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나는 서영이와 시간을 보내러 온 거니깐. 몬쨈에 오르면서 한 발짝 가까워졌던 것처럼 이제는 서영이와 오늘에 대해서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서영이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서영이는 지금 무슨 기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