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 와서도 숙제를?
뭐든지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순간이 존재하는데, 나에겐 서영이와의 여행이 그랬다.
캐디라는 직업의 특성상, 겨울에는 다소 여유롭게 일을 할 수 있는 편이다. 한국의 추운 겨울은 잔디가 얼어 골프 치기 좋은 환경이 아니기에, 골프장의 고객들이 다 따뜻한 나라로 골프 치러 가는 덕분이다. 그렇기에 장기 여행을 위해선 골프장이 비성수기인 겨울에 가야 했고, 그래서 1월에 떠나기로 했다.
1월에 떠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서영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년에 가게 되면 서영이는 고등학교 3학년이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엔 서영이에게 부담이 될 듯했다. 게다가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활을 하기 전에 여행을 다녀온다면 좋은 추억이 되어 힘든 수험생활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올해 1월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유로, 1월에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한국이 아닌 태국에 왔다 하더라도, 서영이가 한국의 고등학생인 건 변할 수 없는 건가 보다. 서영이가 자는 틈을 타, 아침 산책을 하고 돌아왔더니 어느새 일어난 서영이가 부엌 식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뭔가 하고 봤더니, 영어 지문이 빼곡한 모의고사 문제지.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니 지금 뭐 해?”
“숙제..”
“숙제? 대박이다 진짜”
“2주 동안 학원 안 가니깐 숙제 엄청 많다”
잠에서 덜 깬 건지 아니면 숙제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체념한 건지, 서영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장난기가 발동해버렸다.
“으 누가 여행 와서 숙제를 하노. 진짜 하기 싫겠다.”
「서영이 약 올리기 1단계 – 말로 살살 약 올린다. 」
이런 나의 놀림에 내성이 생겨버린 건지, 서영이는 나를 한 번 째려보더니 귀를 막고 다시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내가 아니다. 반응이 없다면, 2단계를 사용할 차례다.
「서영이 약 올리기 2단계- 카메라를 들이민다.」
요리조리 휴대폰을 서영이 얼굴에 들이미며 찍기 시작한다.
“아 언니 뭐하는데! 하지 마라!”
“여기 보세요~ 어머. 치앙마이까지 와서 숙제를 하시나 봐요. 어쩔 수 없는 한국의 고등학생이신가 봐요”
끈질긴 나의 장난에 서영이가 ‘아 진짜’를 외치며 문제지를 치운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악랄한 방법이긴 하지만, 여기는 지금 한국도 아니고 우리는 지금 놀아야 하는데, 서영이가 숙제를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만큼은 고등학교 2학년이 아니라 낭랑 18세 김서영이 되었으면 좋겠다.
숙제를 치우게 만든 다음, 서영이에게 바로 옆에 예쁜 브런치 카페가 있다고 가보자고 서영이를 유혹했다. 먹보 서영이라면 절대 참지 못할 게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서영이는 슬금슬금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서영이 옆에서 나도 준비를 하고 가방에 화장품과 삼각대를 담고, 대문을 나섰다.
예쁜 카페를 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반캉왓 마을.
다양한 상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현지 예술인들의 공동체 마을이다. 찾아본 바로는, 2014년에 ‘나따웃 룩프라싯’이라는 아티스트에 의해 조성된 공동체 마을로서, 마을 내 상점들이 판매하는 품목이 겹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볼거리가 다양하다고 한다.
지난번 혼자 왔을 때도, 노트 만들기 클래스가 있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을 상점 전체가 휴무인 날이었고, 노트 만들기 클래스를 하는 곳만 운영을 하고 있어 둘러볼 기회가 없었다.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고, 오늘이 바로 그 기회를 잡는 날이다.
반캉왓 마을은 우리 숙소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늦게 갈 수는 없다. 게다가, 여기는 입소문이 난 곳이기에 관광객들이 많을 확률이 높다. 문 여는 시간에 맞춰 가야 한다! 사실 서영이의 숙제를 덮게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벌써 구경하고 있는 관광객들이 보인다. 늦을세라, 우리도 그들의 틈에 합류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정말 작은 곳인데, 구석구석 둘러볼 곳이 많다. 소품 상점에서부터, 그림들이 잔뜩 걸려있는 상점, 달콤한 후식을 파는 카페, 여러 종류의 책들이 있는 아담한 규모의 도서관까지. 이게 끝이 아니다. 구석으로 들어가 보니, 고양이들이 있다. 게다가 이게 웬걸. 닭들도 보인다. 작은 곳인데 없는 게 없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어색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예술인들의 공존을 목표로 한 마을이라는데, 정말이지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공존하고 있다.
나도 이 예술의 공동체와 공존을 이루고자 마을 안 카페에 들어가 가장 예뻐 보이는 음료를 주문한다. 음료가 나오고 역시나, 너무 예쁘다. 음료의 데코레이션이 이렇게 예쁠 수 있나. 여러 번 사진을 찍고, 음료를 한 입 먹는데, 앗. 맛이 이상하다.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없을 순 있구나. 나의 음료 선택은 보기 좋게 실패다. 역시 예술은 나와 맞지 않는 건가 생각하며, 서영이와 반캉왓 마을을 나섰다.
오전부터 걸어서 돌아다니니, 허기가 몰려왔고 이제는 내가 서영이를 유혹하기 위해 말했던 카페로 가야 할 차례다. ‘네이버후드 카페’라고 음료뿐 아니라 각종 식사류를 판다기에, 점심을 먹기 좋을 것 같았다. 근데 와 보니 바로 우리 숙소 옆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항상 일정을 일찍 시작한 탓에 바로 옆에 카페가 있는지도 몰랐다. 서영이와 ‘와 대박’을 외치며 카페로 들어갔다.
친절한 아주머니가 보여주시는 메뉴판에는 각종 메뉴에 대한 그림이 있다. 아 이번엔 제발 실패하면 안 될 텐데. 음료를 실패하는 건 눈감아 줄 수 있지만 음식을 실패하는 건 정말 최악이다. 고민 또 고민하며, 제일 무난해 보이는 블랙페퍼 파스타를 골랐다. 후추랑 파스탄데, 맛이 없을 순 없겠지. 얼마 시간이 지난 후 음식이 나왔고, 포크에 돌돌 말아 한 입 먹자, 바로 탄성이 나왔다. 와 이거지. 초등학생 입맛인 나한테는 딱이다. 그렇게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하고 음료를 먹으며, 아까 반캉왓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서영이가 조용하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아까 아침에 포기하게 만들었던 영어 모의고사 문제지다. 내가 가방에 화장품과 삼각대를 담을 동안 뭐하나 했더니 그새 가방에 숙제를 챙긴 모양이다. 내가 제일 끈질기다 생각했는데, 서영이는 나보다 더하다. 뛰는 혜미 위에 나는 서영이다.
“와 진짜 대단하다. 여기서 숙제가 눈에 들어오나?”
“해야지.. 얼른 끝내야 나도 나중에 맘 편하게 논다..”
“한국 가서 하면 안 되나?”
“언니. 미루면 미룰수록 숙제는 늘어난다..”
맞는 말이긴 하다. 숙제를 미루고 한국에 가면 숙제는 배로 늘어나 있을 거고, 서영이도 마음 편하게 놀 수 없을 테다. 솔직히 말하면, 서영이가 하루 종일 숙제를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틈날 때마다 자기가 한다는데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사실 좀 놀랬다. 오전부터 하루 종일 놀아서 서영이에게 숙제는 잊힌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것. 새로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서영이의 마음 한 구석에는 숙제라는 무거운 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만 오늘 하루를 즐긴 것 같아 괜히 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려면 서영이가 숙제를 빨리 끝내도록 돕는 수밖에 없다. 숙제가 사라지면 서영이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즐길 수 있을 테니깐!
“그럼 내가 니가 하나 끝내면 내가 채점해줄게. 내가 채점할 동안, 다른 거 하고 있으면 되잖아.”
“오 콜”
“그리고 아침마다 숙제하셈. 안 괴롭힐게. 아침은 숙제 타임”
“그래 빨리 끝내보자”
여기서는 그냥 낭랑 18세가 되길 바랐는데, 어쩔 수 없는 한국의 고등학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