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의 야시장, 플로엔 루디 마켓
치앙마이에는 각종 야시장들이 있는데, 야시장 중에서도 현대적이고 젊은 느낌이 가득한 곳을 찾는다면, 내가 지금 와 있는 이곳, 플로엔 루디 마켓을 추천한다.
사실 야시장이라 하기엔 크기가 너무 작지만 어쨌든 마켓이니, 나는 이곳을 젊은이들의 야시장이라 부른다.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면, 한가운데 무대가 있고 그 주위를 푸드트럭이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푸드트럭은 아니고 작은 가게다) 무대를 보며 흥을 돋우는 곳이다보니, 파는 음식도 맥주 혹은 칵테일과 어울리는 립 갈비나 컵 스테이크, 혹은 간단한 종류의 스낵을 판다.
이곳의 신나는 무대는 젊고 개성이 강한 밴드들이 채운다. 한 팀씩 돌아가며 다양한 종류의 노래를 부르는데,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 덕에 지루할 틈이 없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대개 둘로 나뉜다. 앞에 나가서 춤을 추는 사람과 그들을 보며 박수를 치는 사람. 내가 좀 외향적이다 싶으면 춤을 추는 사람들 틈에 끼여 몸을 흔들면 되고, 내향적이다 싶으면, 춤을 추는 이들을 바라보며, 박수를 보내면 된다. 그렇게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플로엔 루디 마켓.
나는 지금 박수를 보내고 있는데, 이건 내가 내향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단 전적으로 피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잠이 온다. 눈이 감긴다. 내 체력의 한계다. 여기에서 음식을 먹으며 춤을 추는, 그런 내 안의 외향적인 모습을 끌어내고자 이곳을 왔건만, 나는 아까부터 눈이 감긴다. 나는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오늘 우리의 하루를 다시 되돌아보면, 오전에는 반캉왓 마을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택시투어를 했다. 그 말은 오늘 하루 동안 쉴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는 어제 밤늦게 치앙마이에 도착했다고! 피곤할만하지 않냐며 말하고 싶은데, 웬걸? 내 옆의 이 팔팔하고 낭랑하기 그지없는 18세 서영이는 눈에서 막 빛이 난다. 빡센 일정 탓이라 하기엔 나만 피곤한 모양이다. 다른 변명을 해보자면, 습관 탓이다. 사실 캐디로 일을 하고 나서부터 직업의 특성 상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오후 10시 전에 잠드는 습관이 들었는데, 그 습관의 무서움이 여기서 발동한 것이다.
젊은이들처럼 밤늦게까지 놀고 싶은데, 눈이 감기는 나를 어찌할까. 이런 나를 두고 서영이는 마켓 여기저기를 누비기 시작한다. 우리 방금 립 갈비 받아왔잖아. 좀 앉으면 안 되겠니? 립 갈비가 부족한지 기어코 건너편에서 달달한 바나나 로띠를 사 들고 신나게 오는 서영이. 정말 지치지도 않나 보다. 이렇게 옆에서 신나 있는데 계속 피곤한 채로 있을 순 없다.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서영이가 오자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내가 오자고 해서 온 건데! 분위기를 망칠 순 없다.
그래서 나는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전혀 피곤하지 않다. 지치지 않는다.] 나의 간절한 체면을 SNS에 올렸더니 곧바로 엄마가 답장이 온다.
- 뻥
엄마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도 뻥인걸 알면 서영이는 벌써 눈치챘지 않을까?
“언니 피곤하면 이제 그냥 숙소 갈까?”
역시나다.
“티 나나?”
“당연하지. 괜찮다 언니. 나보다 늙었잖아”
뭐..? 늙었어? 아니 물론 내가 서영이보다 5살 많긴 하지만, 나도 아직 20대 초반이라고. 정말 나이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 욕 하기 딱 좋다. 이 어이없는 소리를 엄마에게 전달하니
- 당연. 10대와 20댄데.
엄마까지 이러기야? 그러면 엄마는 할머니다!
근데 나이를 떠나, 체력으로 덤빌 수 없는 건 사실이다. 무릎이 아파서 운동을 그만뒀다곤 하나, 잘 먹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나보다 체력이 좋긴 하다. 게다가 나는 잠에 정말 취약하다. ‘밥 먹을래, 잠을 잘래’를 물어보면 나는 당연히 후자다. 낮잠은 필수고 시간도 기본적으로 1시간 이상이다. 고등학생 때는 짧은 쉬는 시간에도 잠을 잤고 대학교에서는 잠을 자기엔 부족한 한 시간 공강일 때마저도 기숙사에서 잠을 잤으니 말 다 했다. 심지어 시험 기간에도 밤샘을 해본 적이 없다. 버스에서 자는 건 기본이니 이제 그만 내가 얼마나 잠이 많은지는 말을 아끼겠다.
이렇게나 잠이 많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침잠은 없다. 시험기간에 밤샘은 못해도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를 했고, 캐디 생활을 하면서도 지각한 적은 0건이다. 잠이 많은 건 맞지만 아침잠은 없는 나. 뻔뻔한 면이 있어도 일단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반면 서영이는 올빼미다. 서영이와 나는 방 하나를 같이 쓰는데, 먼저 잠드는 걸 본 적이 드물다. 내가 불 끄라고 소리치면 불 끄고 침대에서 폰을 하거나, 불을 끄고 스리슬쩍 거실로 나가서 친구와 통화를 한다. 시험기간에 공부를 하는 것도 정반대다. 아침에 하기보단, 새벽 늦게까지 하는 스타일. 이렇게 보니, 체력의 차이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아침형 인간과 올빼미의 차이 아냐?
그렇게 믿고 싶다. 고작 5살 차이 나는데, 내가 정말 나이가 동생보다 많아서 체력이 후달린다는 소리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냥 체력이 딸린다는 말도 싫다. 내가 너무 약해 보이니깐! 그냥 생활습관의 차이라고 하면 안 될까?)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서영이는 내가 나이가 본인보다 많아서 체력이 딸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평소에도 자기 또래의 유행어를 모른다고 늙은이 취급하는데, 여기서 정말 늙은이로 낙인찍힐 판이다. 체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짜야한다. 아까 말했지 않나. 여기는 음식뿐만 아니라 음악과 춤이 함께 있는 곳이라고. 그래, 내가 무대 근처로 가 저 밴드와 어울려야 한다. 그럼 서영이는 오, 언니 그래도 덜 지쳤나 보네? 나랑 놀 체력은 되네?라고 하지 않을까? 스르르 감기던 눈을 부릅뜨고, 엉덩이를 씰룩대며, 무대 근처로 간다. 차마 무대 위로 갈 용기는 없다. 그래도 서영이가 웃는다. 언니 뭐하는 짓이냐고. 그게 춤이냐며.
그래 나는 몸치다. 그렇지만 여기는 음악을 즐기면 되지, 춤 실력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러면 음악에 어울리게만 몸을 흔들면 되지 않나. 잔잔한 노래가 나오면 팔만 살랑 흔들고 신나는 노래가 나오면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발 스텝을 현란하게 하면 된다. 나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한참 동안 “언니 어떤데” 하며, 서영이를 향해 춤을 춘다.
“그만해라 이제, 체력 좋다고 해줄게.”
저질인 언니의 춤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뱉은 말인 것 같지만 아무튼 체력이 좋다고 인정받았으니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한다. 이제 유행어 몰라도 10대한테 늙은이 취급 안 받겠지?
근데 몸이 점점 처진다. 눈은 아까보다 더 감긴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