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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미 Sep 07. 2022

모든 것은 필연적이야

치앙마이의 이른 아침

이른 아침이다.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잠든 동생을 뒤로하고 대문을 나선다.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햇볕이 내리쬔다.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쓰다듬는다. 괜찮다고, 결국 너는 해냈다고.     


스물둘,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냅다 휴학을 했다. 오랜 다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4년 중 절반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1년 동안 오로지 나만을 위한 여행을 하겠다는 다짐. 다짐의 첫 시작은 함께 성당을 다니는 언니와의 코타키나발루 여행이었고 두 번째는 혼자 한 달간 다녀온 치앙마이 여행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였던 여행은 다짐의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깐,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온 나의 다짐은 고작 4월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렸단 얘기다. 마지막이 되어버린 까닭은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한 달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했기 때문에.    

 

낯설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 그렇지만 왠지 여유롭고 친근한 이곳. 뜨거운 햇빛 탓일까, 늘어지는 사람들을 따라 나 또한 마음을 늘어트렸던 치앙마이. 이곳에서 나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나에게 온전히 집중한 채, 나도 모르던 나를 알아갔다. 가령, 더운 것을 끔찍이 싫어한다 했지만, 치앙마이에선 40도가 육박하는 더위에도 느긋이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거나, 맥주를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숙소에 돌아오면 조용히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켜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랬다. 치앙마이는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로 나 스스로를 알아가도록 만든 곳이었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한 달간의 시간이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던 그 순간, 동생을 데리고 오고 싶어졌다. 내가 느낀 것을 동생이 일찍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힘으로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이제껏 언니 노릇 제대로 못한 내가, 이렇게라도 언니 노릇을 하고 싶다. 나의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거리며 나온 생각인 탓에, 누군가가 ‘그러니깐 왜? 동생을 데리고 가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어느 하나 특정하지 못한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래야 될 것 같았고.     


그러나 깨달음과 다짐은 현실에 부딪혀 희미해지기도 한다.


동생을 데리고 다시 이 치앙마이에 오고 싶은데 돈이 없다. 일을 해야 했다. 단시간에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알바 앱을 샅샅이 뒤졌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알바를 찾는 내게 친구는 솔깃한 일을 추천해 주었다. 골프장 캐디. 공만 잘 보면 되고 하는 일도 쉬운데 돈도 많이 준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도 쉬운데 돈을 많이 주는 일이 있겠냐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는 친구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몰랐다. 그때 친구의 유혹이 나를 고생길로 이끌지는.     


같이 캐디를 하자던 친구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까지 포기할 순 없었다. 각종 인터넷 카페를 뒤지며 골프장 캐디를 모집하는 곳을 검색했다. 그리고 찾게 된 경주의 어느 골프장.

“캐디 하면 성희롱 많이 당한다던데,, 다른 일 찾아보면 안 될까?”

엄마, 아빠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비친다. 혼자 장기간 여행을 갈 때도, 휴학을 할 때도 아무 소리 않던 분들이.

괜히 큰소리쳤다. 내가 그런 일에 당할 사람이냐고. 힘들면 언제든 내려오겠다고.     


그렇게 올라간 경주에서, 나는 매일이 힘들었다. 성희롱 따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내가 너무 못난 사람이라는 자괴감.

캐디를 하려면 골프에 관해서 알아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골프 룰도, 골프용어도 심지어 운전까지도. 치앙마이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에 자신이 있던 사람이었는데 경주에 오고 나서부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매일같이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골프장을 걸으며 코스를 익혀야 했고 고객에게 맞는 클럽 서브하는 법을 배워야 했으며, 스코어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이 모든 걸 능숙하게 해내기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매정한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질 않았고 나는 실수투성이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던 5월의 어느 날, 샤워기를 틀고 숨죽여 울었다.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 하는 거지? 그만큼 여행이 나에게 중요한가? 동생을 왜 데리고 가고 싶었을까. 그냥 돌아가고 싶어.

이런 수많은 물음 끝에도,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힘들면 언제든 내려오라는 엄마의 말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나는 이곳에 남기로 택했다.

뱉은 말을 지키고 싶었다. 여행에서 얻은 다짐이 현실로 인해 무뎌지지 않기를 바랐다.

치앙마이에서 즐거워할 서영이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곳의 정취를 다시 느끼고 싶어졌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부모님의 따뜻한 품속이 아니라 치앙마이였다. 그러기 위해선 버텨야 했다. 뭐든지 3개월만 버티면 괜찮아진다는데. 그렇게 다짐하며 버티던 날들이 반년이 흘렀고 한 해를 넘겼고 1월에 나는 돌아왔다 치앙마이로.     

숨통이 트인다. 콧구멍에 벌레가 들어올 만큼 숨을 들이마셨다가 갈비뼈가 쪼그라들 정도로 숨을 내쉰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숨을 쉬었을 뿐인데, 그간의 힘든 감정들이 빠져나갔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 그간의 했던 모든 고생들이 당연해졌다. 오기 위한 관문이었을 뿐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3개월간 나는 그 누구보다 힘들어했다. 남들 다 자는 새벽에 잠이 깨고,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기 일쑤였다. 사람들 앞에서 웃고 있는데 속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완벽해지고 싶은 마음은 나를 압박했다. 모든 것이 힘들었음에도, 다시 지난 5월로 돌아가겠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않고 예스라고 답할 것이다. 이 일을 통해 내 다짐을 다시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건 지금 이 순간에 있어 필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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