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한국 축구 공격수가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것, 게다가 득점왕을 차지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만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일이 오늘날 현실이 되었다. 2021~2022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을 바로 대한민국의 손흥민이 차지한 것이다.
손흥민이 없었던 90년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 선수는 황선홍이었다.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특히 일본 킬러로 명성이 높았지만, 94년 월드컵에서의 부진이 큰 뇌리에 박혀 큰 경기에 약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한 번의 찬스를 놓치면 역시 황선홍이라는 야유와 함께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난 황선홍이 좋았다. 94년 월드컵 독일 전에서의 골이 그 시작이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골을 넣었지만, 오히려 그동안 부진했던 자신을 자책하는 세리머니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그 모습은 큰 임팩트를 남겼다. 이후, 황선홍의 플레이에 집중하며 자연스레 그의 가치를 알아갔고, 더욱 그에게 빠져들었다. 심지어 팀이 이기는 것보다, 황선홍이 골을 넣느냐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기도 했다. 90년대에 손흥민이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이 황선홍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사람과 대상에 한순간에 꽂힐 수 있다. 노래를 잘해서, 연기를 잘해서, 잘 생겨서, 그림을 잘 그려서, 똑똑해서, 말을 너무 잘해서 등등 눈길이 갈 수도 있겠지만, 어떤 분위기, 특정 포즈, 표정, 말투, 행동 등 사소한 것에 눈길이 가며 빠져들 수도 있다. 꼭 그 분야의 엄청난 실력과 재능이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물론, 황선홍은 당시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실력도 최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그가 지금 현역으로 뛰고 있다면 어떨까. 월드 클래스 손흥민과 호흡을 맞춰, 더욱 세련된 플레이를 보여주지 않을까.
어쩌면 대표팀 주전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고, 전략에 따라 대표팀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논쟁은 큰 의미가 없다. 난 그저 황선홍의 팬으로서, 생각할 뿐이다. 손흥민의 패스를 받은 황선홍의 원더골을. 그것이 월드컵 결승전 결승골이라면 어떨까,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말도 안 되지만 감격적인 상상에 빠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