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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로드 Sep 10. 2023

애정결핍자들의 가스라이팅

나의 자가면역질환원인#6

어린 시절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은
치유되기 전까지 그 어린 나이에 머물러있다.

 주변에 나이가 많음에도
미성숙해 보이는 사람들은
어딘가 성장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략 5살 정도부터 정서적 방임을 경험한 나는 자라는 동안 내 마음이 5살에 머물러 있다는 걸 심리학 서적을 접하고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 중 그 누구도 나의 이런 마음을 20살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21살에 수능점수를 보고 기겁을 하며 나와 대화를 시도하는 그들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당시는 이단교회에서 나와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들은 내가 말을 안 하니(실상은 선택적 함구증의 말이 안 나오는 증상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의 childcare가 나의 20대에 시작된 것이다. 사춘기에 방황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미 20살은 누군가 개입하기에는 한참이나 늦었다. 나는 벙어리냉가슴처럼 말도 못 하고 '왜 갑자기 이럴까' '그냥 전처럼 내버려 두면 되는데......'라는 생각뿐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냥 '사정이 있었겠지' 하며 '믿고 기다려 줄 수는 없었을까?' 싶다. 말을 안 하면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줘야지 그렇게 몰아쳤어야 했나?


그들은 20년이나 지난 세월 끝에 수능 점수 하나로 막내딸이 세상천지 바보인걸 그제야 확인하고 적극적으로  인생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그건 더 큰 의존성 성격장애를 만들었으리라. 황하는 사춘기 마음에 점수로만 판단하는 그곳은 가정이 아닌 험한 사회였다. 한 번도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해 내면의 힘이 없는 상태에서 공격을 당했다. 그 이후 우리 집은 4:1의 구조를 유지하며 힘의 불균형이 시작되었다.


오은영 박사님 방송에 선택적 함구증을 가진 아이의 더딘 기질, slow to warm up에 대해 나온다. 그들에게 질문공격은 금지다. 땍땍거리는 말투들,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질문해 대는 큰언니. 갑자기 이런저런 대학을 추천하는 둘째 언니. 등학생만도 못하다며 무시하는 아빠, 오만상을 찌푸리던 엄마, 정말 그들은 내가 바보가 된 줄 알았나 보다. 실제로 그랬던 것도 같다. 인생을 걸었던 이단교회를 나와 멘붕상태였다. 하지만 그 시점에 내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건 시간이었다.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 필요했고, 수능공부를 너무도 하고 싶어 했던 시점이었다. 우연히 명상이나 심리학을 접했다면 더 좋았을 거다.


나중에 내 아이가 그래도 저럴까? '사정이 있겠지' 믿어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한참을 더 지나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의 지나친 통제와 간섭은 그들의 '결핍'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결핍이 있으면 강요하고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생각해 보니 다들 애정결핍이다. 엄마와 아빠가 그러고 자녀들이 다 그렇다. 크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각자의 결핍으로 자꾸만 간섭하고 통제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했다.


큰언니가 아르바이트해서 매달 내게 학원비로 20만 원을 주었는데 공부를 하지 않고 이단교회 성전세로 냈다는 거, 그 모든 시간을 사역에 썼다는 거. 그거에 대해 상당한 죄책감을 갖고 하라는 대로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그토록 열성적이던 이단교회를 나와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그 이단교회로 가게 될까 두려워 집에서 시키는 대로 멀리 있는 전문대에 다니는 게 나았을 수도 있다생각했다.  그러나 언니들이 결정한 취업 잘 되는 세무회계학과는 조용한 adhd성향이 있던 나와 전혀 맞지 않았다. 이미 입학금을 낸지라 전공을 바꾸기도 애매했다. 언니의 논리대로 편입을 해서 4년제에 가는 게 답이 아니었다. 내가 내 성향 맞는 길을 찾아가기에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차라리 삼수를 해서 학부로 갔으면 전공을 탐색할 시간도 있고, 편입할 때 열정으로 삼수를 했다면 당신들 돈 쓰지 않고 장학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갔다면 나는 또 전도한다고 그 이단에 빠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어느 정도 그곳의 믿음이 계속 있던 상태였기에. 좋은 대학 캠퍼스에 은밀하게 자리 잡은 장재형집단, 장다윗교에 또 빠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 두려움과 불안함을 어찌할 줄 모르고 나는 결국 가족들에게 짐만 되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런 생각도 든다. 딱 봐도 당시 나의 정신상태가 온전치가 않았을 텐데 심리치유센터나 상담사를 찾아볼 생각은 못했을까? 가족의 도움으로 이단상담소 갔다가 깨고 나왔다는 후기들을 보면 가끔 부러웠다. 뭐 하고 다녔는지 말이 안 나오는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불안장애가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넌 말을 안 하니까"라며 몰아붙여지기만 했다. 더불어 일 년 동안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영적인 감만 세져 망상 증세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내 결정권은 없어졌고 점점 더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하고 기가 죽었다. 마치 줄 하나에 서있는 어설픈 광대처럼 불안에 떨며 겨우 살 얼음판을 걷듯 묘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다 너를 위한 거야


가스라이팅을 공부하고 나니 새로운 시각이 열렸다. 나를 위한다던 그들의 노력과 모든 희생...... 그건 단 한 번도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가족에게 짐 되지 말고, 기여하는 인간이 되라고, 어디 가서 취업은 해서 집에 돈 내라고 했던 그들의 선택이었다. 전혀 내 마음을 고려하지 않았다. 선택적 함구증으로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그게 불안장애인줄도 모르고 그냥 말도 못 하는 바보로 취급하고, 무슨 지적장애인 훈련하듯 이끌었다.


 자포자기 상태였던 나는 그대로 따랐다가 더욱 그들의 짐만 되어 같다. 그러고는 한 번씩 철들었다 싶으면, '내가 겨우 사람을 만들었다.'는 내색을 한 번씩 내비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17살까지 애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으면서...... 아니 이미 미취학 아동 때 불안장애로 벌벌 떠는 줄도 몰랐었구나. 20살 이후에도 전혀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을 거다. 그냥 점수. 대학. 돈.


애정결핍의 의존성성격장애로 자란 나는 가스라이팅을 구걸하고, 통제와 간섭의 성향이 짙은 애정결핍자들은 지나치게 선을 넘어 무의식적으로 가스라이팅을 하고. 이 악순환의 끝은 32살 명상을 배우기 전까지 해결 조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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